▲다카시마 무연고자 묘지 '센닌즈카'의 공양탑. 수년 전 한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이 추모의 현수막을 걸어두었다.
전은옥
일본은 나라 자체가 섬이지만, 전 국토에 크고 작은 섬이 무척 많다. 그래서 섬을 뜻하는 '시마(島)'라는 낱말이 뒤에 따라붙어 '○○시마'라는 지명도 많다. 나가사키시 근방에도 이오지마, 하시마, 토비시마, 나카노시마, 노지마, 쿠로시마, 다카시마 등 셀 수 없이 많은 섬들이 있다. 이중 전회에 소개했던 다카시마는 나가사키시 중심부 오하토 항에서 배로 40분 정도면 닿은 섬으로 하시마와 함께 일본 최고의 원료탄을 산출하는 우수한 해저탄광섬이었다.
나가사키현에는 1952년 기준으로, 117개의 탄광이 있었는데 다카시마는 최후에 폐광한 섬이다. 미쯔비시의 경영 아래 하시마, 다카시마에는 미국, 영국의 근대적 채탄기술이 도입되었고, 건축과 전기 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기술 실험장이 되었다. 미쯔비시는 이곳에서 생산된 대량의 석탄을 북규슈나 관서지방에 보냈는데 나가사키 현에서 생산된 약630만 톤의 석탄은 전국 출탄량의 10%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곳 다카시마는 북규슈의 '카와스지 오토코(川筋男)'로 통한 치쿠호 방면의 우락부락하고 난폭한 남자들 사이에서도 "나가사키의 다카시마"라고 하면 부들부들 떨 정도로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 혹독했던 섬에는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묻힌 한 많은 넋들이 있다.
다카시마 선착장에 내려 오른쪽으로 조금 걷다보면 면사무소, 그 옆을 따라 난 계단을 오르면 나즈막한 콩겐야마(권현산, 勧現山)에 다다른다. 콩겐야마 묘지를 지나 인적드문 수풀을 헤치고 열대림 탐험을 하듯이 속깊이 들어가자 쓸쓸히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동네 사람들이 '센닌즈카(千人塚)'라고 부르는 '무연고자', 잊혀진 노동자들의 묘지다.
이곳에 덩그러니 세워진 비석에는 공양탑이라는 큰 글자가 정면에 새겨져 있는데 쇼와 63년(1998)에 미쯔비시 광업 주식회사가 세운 것으로, "영대 공양을 위해 당 묘지의 유골은 금송사 납골당에 이전, 안치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앞서 1920년 4월에도 같은 자리에 비를 건립한 적이 있다. 당시 다카시마 탄광에 큰 사고가 있어 그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에서 공양탑 무연고자 묘지를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본래는 지금 세워진 방향에서 왼쪽으로 향해 건립돼 있던 것을, 하시마가 74년 먼저 폐광하고 섬을 무인도화하면서 그곳의 무연고자 유골을 다카시마 무연고자 묘지에 합치기 위해서 옮길 때 NBC(나가사키 방송)에서 촬영을 한 필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다카시마도 86년 폐광을 하면서 이곳에 묻힌 유골을 분골해서 인근의 절 '킨쇼지(금송사,金松寺)'에 종이컵만한 통에 넣고, 남은 유골은 그대로 이곳에 매장했다. 지금은 유골들이 땅 속에서 어떤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공양탑도 이후에 새롭게 다시 세운 것이다.
센닌즈카에 묻힌 주검은 대체로 다카시마에서 탄광사고로 죽은 이들, 그리고 바다에서 조난을 당한 표류자들, 그리고 하시마에서 나온 사망자들의 것이다. 지옥의 해저탄광섬이었던 하시마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옆의 섬 나카노시마에서 화장을 해서 하시마의 유일한 절 센푸쿠지에 안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시마 폐광을 앞두고 센푸쿠지의 유골은 다카시마의 센닌즈카로 옮겨졌다. 1974년의 일이다.
이때 큰 문제가 발생했다. 하시마로부터 옮겨온 유골에는 저마다 위패가 있어 사망자의 이름이나, 출신, 사망원인 등이 적혀 있었는데 위패를 둘 공간도 없고 필요없다는 이유로 위패를 불태우고 유골함만 안치한 것이다. 다행히 '하시마 사망자 화장 인허증'과 '사망진단서' 가 발견되어 죽은 이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를 얻었지만, 어느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