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닌즈카의 유골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

[나가사키 조선인 강제노동 현장을 가다③] 미쯔비시 광업의 다카시마 탄광(下)

등록 2010.03.04 16:47수정 2010.03.0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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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카시마 무연고자 묘지 '센닌즈카'의 공양탑. 수년 전 한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이 추모의 현수막을 걸어두었다.
다카시마 무연고자 묘지 '센닌즈카'의 공양탑. 수년 전 한국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이 추모의 현수막을 걸어두었다. 전은옥

일본은 나라 자체가 섬이지만, 전 국토에 크고 작은 섬이 무척 많다. 그래서 섬을 뜻하는 '시마(島)'라는 낱말이 뒤에 따라붙어 '○○시마'라는 지명도 많다. 나가사키시 근방에도 이오지마, 하시마, 토비시마, 나카노시마, 노지마, 쿠로시마, 다카시마 등 셀 수 없이 많은 섬들이 있다. 이중 전회에 소개했던 다카시마는 나가사키시 중심부 오하토 항에서 배로 40분 정도면 닿은 섬으로 하시마와 함께 일본 최고의 원료탄을 산출하는 우수한 해저탄광섬이었다.

나가사키현에는 1952년 기준으로, 117개의 탄광이 있었는데 다카시마는 최후에 폐광한 섬이다. 미쯔비시의 경영 아래 하시마, 다카시마에는 미국, 영국의 근대적 채탄기술이 도입되었고, 건축과 전기 기술에 있어서도 세계 최고의 기술 실험장이 되었다. 미쯔비시는 이곳에서 생산된 대량의 석탄을 북규슈나 관서지방에 보냈는데 나가사키 현에서 생산된 약630만 톤의 석탄은 전국 출탄량의 10%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곳 다카시마는 북규슈의 '카와스지 오토코(川筋男)'로 통한 치쿠호 방면의 우락부락하고 난폭한 남자들 사이에서도 "나가사키의 다카시마"라고 하면 부들부들 떨 정도로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 혹독했던 섬에는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묻힌 한 많은 넋들이 있다.

다카시마 선착장에 내려 오른쪽으로 조금 걷다보면 면사무소, 그 옆을 따라 난 계단을 오르면 나즈막한 콩겐야마(권현산, 勧現山)에 다다른다. 콩겐야마 묘지를 지나 인적드문 수풀을 헤치고 열대림 탐험을 하듯이 속깊이 들어가자 쓸쓸히 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동네 사람들이 '센닌즈카(千人塚)'라고 부르는 '무연고자', 잊혀진 노동자들의 묘지다.

이곳에 덩그러니 세워진 비석에는 공양탑이라는 큰 글자가 정면에 새겨져 있는데 쇼와 63년(1998)에 미쯔비시 광업 주식회사가 세운 것으로, "영대 공양을 위해 당 묘지의 유골은 금송사 납골당에 이전, 안치했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실제로는 앞서 1920년 4월에도 같은 자리에 비를 건립한 적이 있다. 당시 다카시마 탄광에 큰 사고가 있어 그 희생자를 기리는 의미에서 공양탑 무연고자 묘지를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본래는 지금 세워진 방향에서 왼쪽으로 향해 건립돼 있던 것을, 하시마가 74년 먼저 폐광하고 섬을 무인도화하면서 그곳의 무연고자 유골을 다카시마 무연고자 묘지에 합치기 위해서 옮길 때 NBC(나가사키 방송)에서 촬영을 한 필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다카시마도 86년 폐광을 하면서 이곳에 묻힌 유골을 분골해서 인근의 절 '킨쇼지(금송사,金松寺)'에 종이컵만한 통에 넣고, 남은 유골은 그대로 이곳에 매장했다. 지금은 유골들이 땅 속에서 어떤 상태로 방치되어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지금 이 자리에 서있는 공양탑도 이후에 새롭게 다시 세운 것이다.

센닌즈카에 묻힌 주검은 대체로 다카시마에서 탄광사고로 죽은 이들, 그리고 바다에서 조난을 당한 표류자들, 그리고 하시마에서 나온 사망자들의 것이다. 지옥의 해저탄광섬이었던 하시마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옆의 섬 나카노시마에서 화장을 해서 하시마의 유일한 절 센푸쿠지에 안치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시마 폐광을 앞두고 센푸쿠지의 유골은 다카시마의 센닌즈카로 옮겨졌다. 1974년의 일이다.


이때 큰 문제가 발생했다. 하시마로부터 옮겨온 유골에는 저마다 위패가 있어 사망자의 이름이나, 출신, 사망원인 등이 적혀 있었는데 위패를 둘 공간도 없고 필요없다는 이유로 위패를 불태우고 유골함만 안치한 것이다. 다행히 '하시마 사망자 화장 인허증'과 '사망진단서' 가 발견되어 죽은 이들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를 얻었지만, 어느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는 분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74년 하시마 폐광의 때, 다카시마로 옮겨온 유골을 안치하고 유골함에 붙어있던 각각의 위패를 불태우고 있다. 위패를 불태움으로써 어느 유골이 누구의 것이며, 어떤 연유로 이곳에서 죽게 되었는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미쯔비시 광업 주식회사(현 미쯔비시 메트리얼)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
74년 하시마 폐광의 때, 다카시마로 옮겨온 유골을 안치하고 유골함에 붙어있던 각각의 위패를 불태우고 있다. 위패를 불태움으로써 어느 유골이 누구의 것이며, 어떤 연유로 이곳에서 죽게 되었는가를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미쯔비시 광업 주식회사(현 미쯔비시 메트리얼)의 책임이라 할 수 있다.NBC 제작 '軍艦島が沈む日'

 조선에서 끌려온 미쯔비시 탄광 노동자의 이름과 출신지, 근무처와 사망원인 등 사자(死者)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던 위패는 불태워지고 말았다. 74년 NBC가 촬영하던 당시 불태워지기 직전의 모습이 증거로 남겨졌다.
조선에서 끌려온 미쯔비시 탄광 노동자의 이름과 출신지, 근무처와 사망원인 등 사자(死者)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남아있던 위패는 불태워지고 말았다. 74년 NBC가 촬영하던 당시 불태워지기 직전의 모습이 증거로 남겨졌다.NBC제작 '軍艦島が沈む日'

1974년 하시마의 센푸쿠지에서 가져온 유골을 이곳에 안치하는 장면을 촬영한 NBC의 보도 프로그램 <군함도가 가라앉는 날>에서 승려의 모습이 보이고, 불교에서 만드는 위패에 분명하게 조선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금송사로 분골된 유골합에는 '불명(不名)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의 대표(당시 사무국장) 다카자네 야스노리 씨가 유골 이송 안치를 담당한 승려를 찾아가 질문을 했을 때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책임을 회피했다고 한다.


지금 킨쇼지에 분골된 유골의 수는 106구다. 전부 조선인인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조선인이 섞여 있다. 하시마에서 죽어 '무연고'라는 이유로 센닌즈카에 묻혔던 사망자 명부에서 자신의 조부 이름을 발견한 군산의 한 대학교수는 미쯔비시 메트리얼(구 미쯔비시 광업)에 조부의 유골 송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쯔비시는 거부했고, 아직도 유골은 본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다카시마쵸의 공무원이 센닌즈카에 유골함을 안치하던 당시의 내부 모습.
다카시마쵸의 공무원이 센닌즈카에 유골함을 안치하던 당시의 내부 모습.NBC제작 '軍艦島が沈む日'

다카자네 대표는 공양탑 앞에서 결연히 말했다.

"이곳의 유골을 송환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미쯔비시는 이곳 센닌즈카를 다시 열어 사자의 유골과 신분을 확인하는 일은 죽은 이에 대한 모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묻힌 분들, 사자에 대한 모욕은 이미 미쯔비시 광업이 했다. 바다에 방치하고 이 작은 섬에 방치된 사람들을 고향에 돌려보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카시마에서 성장한 시바타 토시아키 사무국장(인권을 지키는 모임)은 당시 센닌즈카에 들어와 유골이 묻힌 곳으로 나 있는 작은 구멍 안으로 몰래 들어가 동물의 뼈를 주워 오면 급우들 사이에서 영웅으로 인정받는 식의 놀이장소로도 이용되었다고 추억했다. 그때 시바타 사무국장이 들어간 센닌즈카 안에는 한국 동전이 들어 있었다고 한다.

탄광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탄광을 지키는 신사가 있었는데, 다카시마 신사에는 역시 같은 미쯔비시 광업이 센닌즈카의 새 공양탑과 동일한 시기에 똑같은 문구를 새겨넣은 위령탑이 우뚝 솟아 있었다. 

 인근 절 '금송사'에 분골 안치된 106구의 유골. 전부 조선인 노동자의 유골인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조선인 유골이 포함되어 있다. 이름이 없이 쓸쓸히 남겨진 것이 대부분이다.
인근 절 '금송사'에 분골 안치된 106구의 유골. 전부 조선인 노동자의 유골인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조선인 유골이 포함되어 있다. 이름이 없이 쓸쓸히 남겨진 것이 대부분이다. 전은옥

 조선인을 포함한 다카시마, 하시마 등의 사망자 유골이 분골 안치된 절 금송사.
조선인을 포함한 다카시마, 하시마 등의 사망자 유골이 분골 안치된 절 금송사. 전은옥

다카시마 센닌즈카 무연고자 묘지를 찾아 오르는 언덕길 '오바마' 지구에는 작은 요리점과 술집, 여관이 있어, 작은 방이 3~4개 딸려있던 여관에서는 매매춘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다카자네 대표에 따르면 이 요리집에는 조선여성도 있었고, 20년 전까지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요리점을 운영하며 평생 혼자 살다가 외롭게 죽은 그녀의 존재에 대해서는 섬 사람들 대부분이 인지하고 있었고, "조센삐"라고 불렀다. 그녀는 노년에 병을 얻어 생활보호대상자가 되었다.

나가사키는 온대 지방이지만, 아열대 나무가 많이 심겨져 있다. 다카시마 섬에도 마치 남태평양 섬에라도 놀러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한 나무들이 심겨져 있어 한국에서 취재차 들른 어느 기자가 궁금해 했다. 본래 땅을 기본으로 살고 땅밖에 몰랐던 농민들이 탄광 노동자로 흘러 들어와 살다보니 땅에 대한 그리움에서 취미삼아 여유있는 땅만 보이면 희귀한 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이 이곳의 숲을 형성한 것이다.

다카시마를 네 번째 방문했던 지난 1월 하순, 오랜만에 센닌즈카 무연고자 묘지 주변을 청소했다. 사람의 발길도 끊기고 수풀만 우거진 그곳에서는 조금만 잡초를 뽑고, 방치된 쓰레기나 물건들을 주우면 그곳에서는 온갖 희귀 곤충과 벌레들이 사람의 손길에 깜짝 놀라고 있었다.  
#강제연행 #나가사키 #다카시마 #센닌즈카 무연고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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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모든 아이들이 건강하고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주부이자, 엄마입니다.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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