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화순의 채석장고인돌 유적지 부근에는 이 같은 채석장이 존재하고 있어 자연을 보존하는 의미가 더욱 빛을 발한다.
최육상
그해 9월 12일, 유 총재는 고창·화순·강화의 군 관계자들을 비롯해 세계거석문화협회 추진회원들과 함께 유럽행 비행기에 올랐다. 영국, 프랑스, 독일, 아일랜드로 이어지는 유럽 답사를 마친 유 총재는 곧바로 '세계거석문화협회'의 깃발을 세우는 작업에 들어갔다. 협회 구성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을 유 총재는 이렇게 설명했다.
"고인돌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추진하려면 시간이 많지 않았습니다. 외교부장관에게 문화협력 업무로 각국 대사관들을 총동원하는 외교훈령을 보내달라고 한 뒤, 각국의 고고학회 회장과 고인돌 연구원 등을 초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2월 7일 드디어 세계 35개국 대표들과 해외 석학들을 모셔와 세계거석문화협회를 결성했습니다."유 총재가 '거석문화 국제심포지엄'을 연 것도 이 즈음이었다. 호주, 포르투갈, 벨기에, 인도, 베트남, 일본, 인도네시아 등의 전문가들이 서울에 모두 모여 각 지역의 거석기념물들을 소개하며 비교, 토론했다.
고인돌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문화외교의 쾌거유 총재가 협회와 심포지엄 등을 통해 인연을 맺어 놓은 거석문화 전문가들은 향후 국내 고인돌 현지 시찰과 세계유산 등재 여부를 결정하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큰 힘을 발휘했다.
세계유산위원회의 위촉을 받은 일본 큐슈대학의 '니시타니 다다시' 교수는 우리 고인돌을 시찰해 작성한 보고서에서 "세계적으로 희귀하게 잘 남아 있는 선사시대의 기념물"이라고 고인돌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니시타니 교수의 이 보고서는 2000년 6월 28일 파리 유네스코본부의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해 유 총재는 "유네스코는 로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뒤, "유네스코 세계유산 시험을 치르는데 공부 잘하는 학생한테 평범한 문제를 낸 격이었다"며 웃었다. 이미 국내외 전문가들에게 충분히 검증을 받아 고인돌의 등재를 자신했다는 것이었다.
고인돌이 세계유산에 지정된 이면에는 유 총재 같은 이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흘린 숱한 땀방울들이 배어 있다. 유 총재가 고인돌의 우수한 가치를 해외 전문가들에게 직접 체험하게 한 것은 문화외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 쾌거였다.
한편, 유 총재는 고인돌을 세계유산으로 추진함에 있어 난감했었던 기억을 더듬었다. 정치를 했던 사람에게 정치적인 압박이 가해져 온 것이다.
"DJ정부 시절 외교부를 통해 청와대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고인돌이 고창과 화순 등 전라도에 치중됐으니 세계유산을 나중에 추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칫 호남의 역차별 논란이 불거질 수도 있던 그 때, '경주역사유적지구'를 고인돌에 앞서 세계유산에 올리기로 하고 밀어붙였습니다. 2000년 12월에 경주유적과 고인돌이 차례로 세계유산이 된 배경입니다.""고인돌에 이야기의 상상력을 불어넣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