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55)

[우리 말에 마음쓰기 865] '불과 같은 존재', '산타클로스의 존재' 다듬기

등록 2010.02.22 10:18수정 2010.02.22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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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불과 같은 존재

 

.. 힘들여서 개인의 영광을 쫓거나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한테서 이익을 얻는 가수들은, 노래란 자갈돌을 씻어내리는 물과 같으며 우리들을 깨끗하게 해 주는 바람과 같으며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조안 하라/차미례 옮김-빅토르 하라>(삼천리,2008) 397쪽

 

"개인(個人)의 영광(榮光)을 쫓거나"는 "나 하나한테만 빛이 내리기를 바라거나"나 "내 한몸 잘되기를 바라거나"로 다듬어 봅니다. "순진(純眞)하고 순수(純粹)한"은 "착하고 맑은"으로 손보고, '결(決)코'는 '조금도'로 손봅니다. "이해(理解)하지 못할 것이다"는 "알아채지 못하리라"나 "알 수 없다"로 손질합니다.

 

'이해하다' 같은 한자말은 굳이 손질하지 않아도 될 만하다고 느끼지만, 때와 곳을 찬찬히 헤아리다 보면 '알다-알아채다-알아내다' 같은 말로 손질해 줄 수 있습니다. '느끼다-생각하다-살피다-헤아리다' 같은 말로 손질할 때에도 잘 어울리곤 합니다. '이해'라는 한자말을 써서 잘못이니 아니니가 아니라, 우리들이 '이해'라는 한자말 하나만 즐겨쓰는 동안 때와 곳에 따라 알맞게 쓸 숱한 말마디가 사라지거나 밀려납니다. 우리 스스로 '고른 말(말 다양성)'을 살리지 못하는 노릇이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말 쓰임새를 줄이는 셈입니다.

 

 ┌ 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

 │→ 불과 같은 것임을

 │→ 불과 같음을

 │→ 불과 같이 뜨거움을

 │→ 불과 같이 뜨거운 넋임을

 │→ 불과 같이 뜨거운 외침임을

 └ …

 

보기글을 잘 읽어 보면, 앞 대목에서는 "물과 같은 존재이며"라 하지 않고 "물과 같으며"라 했습니다. 이 다음 대목에서는 "바람과 같으며"라 했지 "바람과 같은 존재이며"라 하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끝 대목에서는 "불과 같은 존재"라 적고 맙니다.

 

물은 물이고 바람은 바람이며 불은 불입니다. 언제나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있는 그대로 말을 하면 됩니다. 꾸밈없이 글로 적으면 됩니다. 느끼는 그대로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괜한 군말을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부질없는 군더더기는 달지 않아도 됩니다. 덧없는 군살을 끼워넣을 까닭이 없습니다.

 

 ┌ 물과 같으며 바람과 같으며 불과 같으며 (o)

 └ 물과 같은 존재이며 바람과 같은 존재이며 불과 같은 존재이며 (x)

 

우리 삶을 곰곰이 돌아보노라면, 우리들은 꾸밈없는 말 문화와 스스럼없는 글 문화를 일구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수한 말 문화와 거리낌없는 글 문화를 보듬지 못하고 있습니다. 조촐한 말 문화와 사랑스러운 글 문화를 껴안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껏 북돋울 수 있는 말을 북돋우지 못하고, 좀더 아낄 수 있는 글을 아끼지 못합니다. 더욱 일으킬 수 있는 말을 일으키지 못하고, 한결 사랑할 수 있는 글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그예 어지러이 나뒹구는 삶이며 넋이며 말입니다. 그저 대충대충 흐르는 삶이며 넋이며 말입니다. 이름값에 휘둘리고 돈값에 억눌리며 힘값에 치이고 있는 삶이며 넋이며 말입니다.

 

 

ㄴ. 산타클로스의 존재

 

.. 그리고, 하루키가 조금 더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기를 바랬던 아버지도! ..  <오자와 마리/hiyoko 옮김-민들레 솜털 (1)>(북박스,2008) 30쪽

 

'바랬던'은 '바랐던'으로 고쳐야 합니다. 그러나, '바라다'에 '-던'을 붙이면서 '바랐 + 던'이 아닌 '바랬 + 던'으로 잘못 쓰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아무래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집식구가 옳게 말하며 살아가지 않으니, 잘못 쓰는 말투를 가다듬지 못하는 한편 우리 스스로 못 느끼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떻게 써야 올바른가 하는 이야기가 늘 떠돌고 퍽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이야기에 제대로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우리들이로구나 싶습니다. '바랐던'이라 적을 말마디를 '바랬던'으로 적으면서도 말잘못을 못 느끼는 우리들이라서라기보다, 우리는 우리 말과 글을 어떻게 가다듬거나 가누거나 갈고닦아야 하는가를 거의 생각하지 못하면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기를

 │

 │→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기를

 │→ 산타클로스가 있음을 믿기를

 │→ 산타클로스가 온다고 믿기를

 │→ 산타클로스가 오는 줄을 믿기를

 └ …

 

그러고 보면, 한자말 '존재'를 사람들이 익숙하게 쓰는 까닭도, 학교에서 '존재' 같은 말마디를 수없이 이야기하며 가르치기 때문이구나 싶습니다. 집식구도 이 낱말을 으레 쓰니 아주 어린 아이일 때부터 길들었겠구나 싶습니다. 텔레비전이든 책이든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존재' 없이 말하는 사람이란 거의 없습니다. 한국사람은 김치 없이 못 산다고 합니다만, 오늘날 우리들은 '존재'라는 말마디 없으면 말을 못 하는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옳은 말이건 옳지 않은 말이건 가리거나 살피지 않는 가운데 이냥저냥 쓰고 있는 말투일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바른 말이건 바르지 않은 말이건 따지거나 돌아보지 않는 가운데 대충대충 쓰고 있는 글투일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바쁘고 힘든 세상에서 바삐 돌아보고 바지런히 살필 일이 너무 많아, 말을 알맞게 가다듬고 글을 슬기롭게 차리는 데에는 힘을 못 쓰는구나 싶습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닌 내 이웃을 밟고 올라서라고 가르치는 학교요 집이요 예배당이다 보니, 내 이웃하고 사랑스레 나눌 말하고는 동떨어지는구나 싶어요. 내 동무를 아끼고 돌보라고 이야기하지 못하는 우리 삶터요 터전이요 일터인 탓에, 내 동무와 알뜰살뜰 살가이 함께할 말하고는 자꾸 멀어지는구나 싶습니다.

 

 ┌ 산타클로스가 선물 주기를 믿기를

 ├ 산타클로스가 선물을 준다고 믿기를

 └ …

 

산타클로스가 이 땅에 있다면 틀림없이 찾아오고, 또 선물을 나누어 줄 테지요. 저는 따로 산타클로스한테 선물을 받기를 바라지 않습니다만, 저한테도 선물 한 가지를 나누어 주신다고 한다면 한 가지를 빌어 봅니다. 사람들이 날마다 쓰는 말과 글을 있는 그대로 느끼면서 좀더 알맞고 알차고 슬기로운 쪽으로 거듭나도록 해 주십사 하고. 스스로 말을 말다이 나누고, 글을 글다이 펼칠 수 있도록 해 주십사 하고.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2.22 10:18ⓒ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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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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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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