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촌이 웃고 울리는 'MB 이미지' 20년사

등록 2010.02.22 13:54수정 2010.02.22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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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대학교 도서관 휴게실에 전해지는 '이명박 전설'은 취업 준비생 치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듣고 또 들은 얘기지만 입담 좋은 친구가 풀어대기 시작하면 그 핑계로 다들 열람실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을 늦추고 수다를 이어갔다.

 

전설의 내용인즉, 70년대 건설업이 힘차게 일어설 때 박정희 대통령이 정주영 현대회장에게 느닷없이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이명박이 잘 있나."

 

대학생 때 격렬하게 데모하더니 지금은 일 열심히 하고 있냐는 뜻에서 물었다는 건데 이 한 마디가 사람의 인생을 바꿔 놨다. 정주영 회장이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전 그룹에 수배령을 내려서 찾아내고 그 이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현대건설 사장에 이르렀다는 내용이다. 사실 이 전설은 와전된 것이라고 생전의 정주영 회장이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박정희 대통령이 정 회장에게 물었던 것은 "고대에서 데모하던 녀석들은 전부 현대에 가 있다며? 그렇게 반골기질 강한 사람들 데려가서 어쩌려는 거야?"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말 짓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솜씨가 곁들여져서 박 대통령이 직접 이명박이란 이름 석 자까지 입에 담은 것으로 돌변했다.

 

80년대 후반, 이명박이란 코드는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도 일할 때는 한 번 제대로 달라붙는다는 의미였다. 그래서 이런 전설도 생겨났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이명박 대통령에 해당하는 배역으로 TV 드라마에 출연한 게 바로 이 무렵이다. 드라마에서 가장 긴박했던 장면이다.

 

군인정권이 들어선 후 유인촌이 기관원들에게 연행돼 사업을 포기할 것을 종용받는다. 유인촌은 절대 뜻을 굽히지 않고 버티다가 마침내 풀려난다.

 

유인촌의 석방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이영후 회장이 돌아온 부하를 와락 끌어안으면서 평안도 사투리로 "이거이 이거 눈에 피 아니네?"라고 말을 건넨다(대놓고 정주영 이명박 일대기라고 할 수는 없어서 가공의 이름을 쓰고 평안도 사투리까지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인촌이 연기한 '이명박' 이미지의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도서관 휴게실의 뿌연 담배 연기 속에만 머물던 전설의 영웅을 대중들에게 널리 알린 드라마가 된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현재 위치에 이른 가장 큰 힘이 바로 여기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싱겁게 끝난 대통령 선거 뿐만 아니라 치열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의 경선에서 승리를 거둔 것도 '샐러리맨 전설 이명박'의 힘이 꿈틀한 탓일 거다.

 

경선 직후 모 한나라당 의원이 "수도권 호남 2세대가 1세대와 다른 정치 성향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분석 결과도 있다"고 얘기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후 오늘날까지 정치흐름을 보면, 그다지 맞는 분석으로 보이지 않는다. 전설에서 비롯돼 유인촌이 대중화한 '이명박 브랜드'가 그때까지 희석되지 않고 살아남아서 한국 정치 특유의 지역 구도까지 일정부분 무너뜨리는 현상이 경선, 대선, 총선까지 나타났던 것이지, 시골 사람이 서울 올라와서 키운 애들이 부모세대와 결별을 선언한 건 아니란 얘기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유인촌 장관은 여전히 이명박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드는 핵심 인물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혀 딴 판이 됐다. 80년대 유인촌이 보여준 이명박은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도 일은 제대로 한번 해보는' 상징이었다. 지금 유 장관을 통해 나타나는 이 대통령은 거의 '생각이 다르면 밥도 먹지 말라'는 수준에 가깝다. '이명박 정권이 하는 일은 다 잘못 됐다'고 하는 것은 그 반대로 '이 정권이 하는 일은 다 잘한다'고 우기는 것만큼이나 잘못 된 소리다.

 

여러 가지 비판이 빗발치고 있지만 극심하게 요동치는 국제 경제 상황에서 지칠 줄 모르고 대응방법을 마련하는 점만큼은 비교적 좋은 소리를 듣는 듯하다. 개중 좋은 소리를 듣는 분야는 유인촌 장관이 맡은 영역과 거의 무관하다. 그 대신 유 장관의 영역에서는 끊임없이 파열음이 들리고 있다. 무슨 사단이 한번 날 때마다 바로 이명박 대통령의 이미지로 직결된다.

 

문화 체육 분야가 다수 대중의 정서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 장관은 여전히 이명박 대통령의 이미지를 만드는 핵심 인물의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집권 초기부터 방송 예술 등 광범위한 문화계에서 전 정권 사람 쫓아내기가 진행됐다.

 

혹자는 '왜 앞선 정권 사람이 물러나지 않고 쫓겨나기를 기다렸나'고 말한다. 5년마다 정권이 바뀌는데 정치권도 아닌 문화 예술계의 3년 4년 임기 기관장들이 대통령과 함께 우루루 몰려다니라는 소리다.

 

빈 자리를 차지한 '새 정권의 사람들'이 과연 문화 예술계에서 전임자들보다 훌륭한 면모를 보이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요란한 소리를 내고 대통령 이미지에 부담까지 주면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라면 엄청나게 훌륭한 결과를 내놔야 뭔가 수지가 맞는 것이 아닐까 한다. 원래 문화 예술의 속성이란 것이 보수층보다는 진보성향의 사람들이 더 강점을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어떻든 문화 예술까지 이 정권은 '내 사람 자리 앉히기'를 강행했다.

 

문화예술위원회에는 두 명의 위원장이 공존하고 있다. 문인단체에 '돈 받고 싶으면 데모하지 마라'는 무례를 저질렀다가 '돈 받을 생각도 없거니와 글로써 저항하겠다'는 분노를 촉발시키고 말았다. 이 모두가 유인촌 장관이 한 일이다. 20년전 생각 다른 사람끼리도 멋지게 일하는 모습을 연출하던 바로 그 사람인데 브라운관이 아닌 장관실로 가더니 이렇게 됐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무리 내복 안입고 난방 타령하는 직원을 꾸짖어도 문화부에서 그릇 깨지는 소리가 한번 들리면 모든 것이 파묻히고 만다. 20년이 지나 이 대통령의 이미지는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다.

2010.02.22 13:54 ⓒ 2010 OhmyNews
#유인촌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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