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려쓰니 아름다운 '우리 말' (98) 드림말

[우리 말에 마음쓰기 866] '깊이있다'와 '심화-심도-심층'

등록 2010.02.24 17:22수정 2010.02.24 17:22
0
원고료로 응원

 

ㄱ. 드림말

 

.. 나는 처음에는 이 시 앞에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하여"라는 드림말을 붙였었다 ..  <신경림-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전예원,1983) 319쪽

 

'붙였었다'는 '붙였다'로 고쳐씁니다. '-었-'은 한 번만 붙이면 되거든요. "억울(抑鬱)하게 죽은 이들을 위(爲)하여"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나, "애꿎게 죽은 이들한테"나 "덧없이 죽은 이들한테"나 "슬프게 죽은 이들한테"나 "안타까이 죽은 이들한테"로 손볼 수 있습니다.

 

 ┌ 드림말

 │  (1) 기뻐하거나 기리는 뜻으로 드리거나 바치는 말

 │  (2) 책을 누군가한테 선사하면서 적는 말

 └ 헌사(獻辭/獻詞)

     (1) 축하하거나 찬양하는 뜻으로 바치는 글

     (2) 지은이나 발행자가 그 책을 다른 사람에게 바치는 뜻을 적은 글

 

출판사에서 누군가한테 책을 선사할 때 흔히 '드림'이라는 도장을 찍습니다. 한자말로는 '증정(贈呈)'을 쓰기도 합니다. 예전에는 '증정'이나 '贈呈'이나 '贈'을 많이 썼고, 1980년대를 넘어서고 1990년대를 넘어서는 가운데 한자로 쓰던 '贈呈'이나 '贈'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한자말로 '증정'을 쓰는 곳이 아직 남았으나, 이제는 거의 모두 '드림'이라는 말을 씁니다.

 

그렇지만 '증정'이나 '기증' 같은 한자말은 예부터 국어사전에 실려 있었어도, '드림'으로 바꾸어 쓰는 토박이말은 아직 국어사전에 못 실립니다. 어쩌면, 국어사전을 엮는 분들 스스로 사람들 말씀씀이를 헤아리지 않은 탓이라 하겠습니다. 여느 사람들이 제아무리 알차고 곱고 바르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더라도 국어학자 눈에 뜨이지 않는다면 국어사전에 담기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 드림 / 드림말

 └ 바침 / 바침말

 

이 보기글을 살피면, 시쓰는 신경림 님은 한자말 '헌사'와 같은 뜻으로 '드림말'이라는 낱말을 지어서 씁니다. 시쓰는 신경림 님이 당신 나름대로 지어서 쓴 낱말이라 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제법 쓰고 있던 말을 기꺼이 받아들여 쓴 낱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낱말은 이때에 살짝 한 번 쓰이다가 다시는 안 쓰였을 수 있고, 알게 모르게 곳곳에서 즐거이 쓰고 있을 수 있어요.

 

곰곰이 따진다면 책을 드리면서 붙이는 말은 말 그대로 '드림말'입니다. 책을 바치면서 올리는 말이라면 '바침말'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한자말로 '증정'이나 '기증'이니 '헌사'이니 하면서 때와 곳에 따라 나누어 쓰듯, 우리는 우리 말로도 얼마든지 '드림말'이니 '바침말'이니 '올림말'이니 '모심말(모시는말)'이니 하면서 때와 곳을 가누며 알맞게 쓸 수 있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 나름이면서, 스스로 새로워지고자 애쓰기 나름입니다. 우리 깜냥껏 우리 삶과 넋과 말을 북돋우기 나름이면서, 우리 깜냥껏 한결 알차고 아름답고 빛나는 터전을 이루고자 힘쓰기 나름입니다.

 

'드림'이라는 낱말을 살며시 쓰고 '드림말'이라는 낱말 또한 살짝살짝 쓰는 가운데, 이 말에 맞추어 '바침말'이나 '올림말'이나 '모심말'뿐 아니라 '나눔말'이나 '사랑말'이나 '어깨동무말'이나 '즐김말'이나 '기쁨말' 같은 새로운 말마디로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새로워지면서 새로운 말을 일굴 수 있고, 우리 스스로 슬기로워지면서 슬기로운 말을 가꿀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워질 길이 있으나 우리 손으로 아름다움을 가꾸지 못하기 일쑤이지만, 조금 더 힘을 내고 땀을 쏟으면서 스스로 곱디고운 매무새를 갖출 수 있습니다. 한결 싱그러울 수 있고 한껏 북돋울 수 있습니다. 더욱 빛날 수 있고 좀더 넉넉할 수 있습니다.

 

 

ㄴ. 깊이있다

 

.. 노동조합의 참된 주인은 누구이고 왜 현 노조간부들은 어용으로 욕먹는가 등등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깊이있게 공부하면서 이제까지의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던가를 깨달았다 ..  <채희석-참된 삶을 위하여>(현장문학사,1989) 10쪽

 

'진정(眞正)한'이 아닌 '참된'을 쓰니 반갑습니다. 그러나, '등등(等等)'은 '따위'나 '같은'이나 '-와 같은'이나 '-을 비롯한'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내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었던가를"은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잘못 생각했던가를"로 손보고, "노동조합의 참된 주인(主人)은"은 "노동조합에서 참된 주인은"이나 "노동조합을 이끄는 참된 임자는"이나 "노동조합을 이루는 참된 일꾼은"으로 손봅니다. '현(現)'은 '지금'이나 '지금 있는'으로 손질하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는 "내가 생각했을 때보다도"나 "내 생각보다도"로 손질해 줍니다.

 

 ┌ 깊이있게 공부하면서 (o)

 │

 ├ 심도(深度) 있게 공부하면서 (x)

 ├ 심층적(深層的)으로 공부하면서 (x)

 ├ 심화(深化) 학습을 하면서 (x)

 ├ 구체적(具體的)으로 공부하면서 (x)

 └ …

 

저는 글을 쓰면서 제가 쓰는 모든 낱말을 국어사전에서 새삼스레 찾아보며 뜻을 다시금 되새기고 쓰임새를 곰곰이 살피곤 합니다. 익히 안다고 생각하던 낱말이라 할지라도 국어사전에서 다시금 찾아보면서 미처 몰랐거나 자칫 잊고 지나칠 뻔하던 느낌과 맛을 헤아립니다. 뜻밖에 국어사전에 실린 낱말을 곱씹고, 아쉽게 국어사전에 빠진 낱말을 걱정합니다.

 

여느 사람이건 출판사 편집자이건 잡지사 기자이건 국어사전을 그리 자주 뒤적이지 않습니다. 그냥저냥 쓰는 말이 제법 많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국어사전에 안 실려 있기 때문에 띄어서 써야 하는 낱말'을 슬며시 붙여 놓고는 모르는 척하곤 합니다. 일부러 한 낱말로 쓴다 할 텐데, 국어사전에 안 실린 낱말이라 할지라도 한 낱말로 쓸 만하다고 느끼면 꾸준하게 한 낱말로 써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국어사전에 올림말로 실리자면 먼저 쓰임새(용례)가 제법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낱말 쓰임새가 제법 나오도록 하려'면 누군가는 '국어사전에 없기 때문에 띄어서 써야 한다지만 국어사전을 아랑곳하지 않으며 붙여서 쓴 보기'가 많아야 합니다. 국어사전에 안 실렸으니 띄어서 써야 하는 말이 아니라, 쓸 만하면 알맞게 쓰면서 이러한 쓰임새를 북돋우는 길로 가야 올바릅니다.

 

'신나다' 같은 낱말은 국어사전 올림말이 못 됩니다. 국어사전을 엮는 국어학자 스스로 모순된 얼거리로 낱말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신나다' 꼴로 올라 있지 않으니 마땅히 띄어서 쓰도록 규정으로 삼았고, 이렇게 규정으로 삼다 보니 신문이며 책이며 잡지며 논문이며 '신나다'가 아닌 '신 나다'로 적힙니다. 이렇게 '신 나다'로 적히면, 국어학자들이 '쓰임새 모으기(용례 수집, 빈도수 조사)'를 하면서 '신 나다'는 한 낱말이 아니기 때문에 '쓰임새 모으는 그물'에 걸려들지 않아 '사람들이 잘 안 쓰는 말'이라 여기며 밀쳐놓거나 '굳이 국어사전에 올릴 만하지 않은 말'로 다루고 맙니다.

 

이와 달리 한자말은 '아직 국어사전에 안 실린 낱말'일지라도 거의 다 '붙여서 써 버릇'하고 있습니다. 이러니 웬만한 '새로 생기거나 새로 쓰는 한자말'은 어김없이 '새로운 올림말'로 다루어지고, '예부터 오래도록 써 왔고 사람들이 두루 쓰는 토박이말'은 국어사전에 못 오르는 잘못이 되풀이됩니다.

 

앞뒤 어긋난 안타까운 얼거리와 매무새는 국어학자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뒤가 어긋난 얼거리와 매무새를 알고는 있어도 바로잡지 않습니다. 바로잡힐 낌새가 보이지 않습니다. 저로서는 하는 수 없이 '국어사전을 따르라고 하는 한글 맞춤법을 일부러 어겨' 가면서 말을 하거나 글을 쓸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쓸모없다'만 국어사전에 실려 있는데, 때때로 '쓸모있다'고 말해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국어사전에 안 실렸으니 '쓸모 있다'처럼 띄어야 한다고 못박지만 '쓸모없다'와 짝을 이루려면 '쓸모있다'로도 적어야 알맞습니다. 거꾸로, '뜻있다'는 국어사전에 실리고 '뜻없다'는 국어사전에 안 실립니다. 그렇지만 '뜻있다'와 함께 '뜻없다'를 써야 할 자리가 있습니다.

 

1989년에 나온 책에 적힌 '깊이있다'라는 낱말은, 글쓴이나 출판사 편집자 모두 못 알아채고 안 띄어서 적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일부러였든 모르고서였든 이렇게 '깊이있다'고 적은 말마디를 읽으면서 이처럼 써도 꽤 괜찮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심도(深度) 있게'라 하거나 '심화(深化) 학습'이라 하거나 '심층적(深層的)으로'라 하지 않아도 넉넉하다고 느낍니다. 어느 때에는 '구체적(具體的)'을 갈음할 만한 낱말이 될 수 있습니다.

 

 ┌ 깊이있다 / 마음있다 / 생각있다 / 쓸모있다 / 뜻있다

 └ 깊이없다 / 마음없다 / 생각없다 / 쓸모없다 / 뜻없다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거나 세상을 부대끼거나 살필 때에 우리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여러모로 추스를 수 있습니다. '넓게' 할 수 있고 '골고루' 할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여러 가지를 배우거나 다스릴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깊이' 할 수 있어요. 샅샅이 살피거나 꼼꼼히 헤아리면서 한 우물을 팔 수 있어요. 이러한 모습을 놓고는 이렇게 이야기하면 잘 어울리고, 저러한 모양새를 놓고는 저렇게 가리키면 잘 들어맞습니다.

 

아직은 낯설거나 힘들다 할지라도 '깊이있다'와 맞물려 '깊이없다' 같은 낱말을 쓸 수 있습니다. 비슷한 짜임새로 '마음있다-마음없다'를 써 보아도 됩니다. '생각있다-생각없다'를 쓰면서 우리 넋과 삶을 한껏 드넓게 나타낼 말길을 틀 수 있습니다. 마음을 쓰기 나름이요 생각을 기울이기 나름입니다. 마음을 들이기 나름이며 생각을 쏟기 나름입니다. 우리는 우리 말을 얼마든지 깊이있는 말이 되도록 보듬을 수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2.24 17:22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살려쓰기 #토박이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제발 하지 마시라...1년 반 만에 1억을 날렸다
  2. 2 아파트 놀이터 삼킨 파도... 강원 바다에서 벌어지는 일
  3. 3 나의 60대에는 그 무엇보다 이걸 원한다
  4. 4 시화호에 등장한 '이것', 자전거 라이더가 극찬을 보냈다
  5. 5 이성계가 심었다는 나무, 어머어마하구나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