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마디 한자말 털기 (91) 파하다罷

[우리 말에 마음쓰기 870] '학교를 파하다', '자리를 파하다' 다듬기

등록 2010.03.03 17:16수정 2010.03.0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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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학교를 파하다

.. 학교를 파하고 나면 남산 옆 공동묘지에 소를 몰고 풀을 뜯기고, 석양이 내리는 저녁 무렵에는 형이 고삐를 잡고 ..  <황선열-따져 읽는 어린이책>(청동거울,2005) 11쪽


저녁때 비치는 햇빛이라는 '석양(夕陽)'입니다. 저녁에 비치는 해이니 말 그대로 '저녁해'인데, 이 자리에서는 '저녁노을'이나 '땅거미'나 '해거름'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남산 옆의 공동묘지"라 하지 않고 "남산 옆 공동묘지"라 한 대목은 반갑습니다. 이와 같이 글을 쓰고 말을 하면서 우리 글멋과 말맛을 차근차근 되씹어 준다면 더없이 고맙습니다.

 ┌ 파하다(罷-) : 어떤 일을 마치거나 그만두다
 │   - 학교가 파하다 / 모임이 파하다 / 잔치를 파하다 / 술자리를 파하다
 │
 ├ 학교를 파하고 나면
 │→ 학교를 마치고 나면
 │→ 학교 공부를 끝내고 나면
 │→ 학교를 나선 뒤에는
 │→ 수업이 끝나고 나면
 │→ 수업을 마치고 나면
 └ …

우리 말 '마치다'나 '끝내다'나 '그치다'나 '그만두다'를 한자로 옮겨 적으면 '罷하다'가 됩니다. 마치거나 끝내거나 그치거나 그만둔다고 하는 모습을 가리키는 자리에 '罷하다'라는 낱말을 쓸 일이 아니라, '마치다-끝내다-그치다-그만두다'는 우리 말이고 '罷하다'는 우리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우리 말을 옳고 바르게 헤아리지 못합니다. 우리 말을 제대로 쓰지 않으며, 바깥말을 우리 말인 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한자말이니 쓰지 말아야 한다거나 영어이니 털어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한자말을 쓸 자리에는 알맞게 쓰고 영어를 써야 하는 곳에서는 바르게 쓰되, 여느 자리에서 우리 생각을 주고받는다 하면 우리 말을 알뜰살뜰 슬기롭게 가다듬으며 써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 모임이 파하다 → 모임이 끝나다 / 모임이 마무리되다
 ├ 잔치를 파하다 → 잔치를 끝내다 / 잔치를 그만두다 / 잔치를 마무리하다
 └ 술자리를 파하다 → 술자리를 끝내다 / 술자리를 접다


학교에서 수업을 마치고, 모임을 즐거이 하고 나서 끝냅니다. 잔치판을 신나게 벌인 다음 마무리를 짓고, 술자리에서 재미나게 어울린 다음 자리를 접습니다.

하나하나 살피면 낱말마다 알맞게 넣을 자리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맛을 살리는 글쓰기와 멋을 북돋우는 말하기를 익힐 수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말하는 사람은 말맛을 살리지 못합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이 삶맛을 살리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생각하는 사람이 마음을 알뜰히 차리지 못하는 매무새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렇게나 글쓰는 사람은 글멋을 북돋우지 못합니다. 아무렇게나 글을 쓰는데 무슨 글멋을 북돋우겠습니다. 아무렇게나 글을 쓰는 터라 글쓴이 스스로 무엇을 말하거나 밝히고자 하는지 찬찬히 드러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읽는이한테도 골치가 아프지만, 쓰는이한테조차 골이 띵합니다.

안타깝게도 우리 터전을 헤아릴 때에 오늘날 우리들은 거의 모두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가면서 이름값을 높이거나 돈을 긁어모으거나 힘을 붙잡는 데에 얽매어 있다고 느낍니다. 삶을 삶답게 차리지 못하고, 넋을 넋답게 추스르지 않습니다. 이에 따라 말을 말답게 갈고닦으려 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모습이란 더없이 마땅한 노릇인지 모릅니다.

ㄴ. 자리를 파하다

.. 자리를 파할 때쯤, 나는 그가 자신은 운동가가 아니라고 하면서 핵심을 지적했다고 말했다 ..  <하워드 진/유강은 옮김-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2002) 60쪽

"핵심(核心)을 지적(指摘)했다고 말했다"를 "고갱이를 짚었다고 말했다"나 "벼리를 잘 알아챘다고 말했다"로 다듬어 보면 어떨까 싶지만, '고갱이'나 '벼리' 같은 낱말을 알맞게 살피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줄거리'라는 낱말조차 제대로 살려서 쓸 줄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오로지 '핵심'이라는 한자말만 쓸 만하다고 여기면서 '알맹이'와 '알속' 같은 낱말로 내 넋과 마음을 나타내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할 만합니다. 사상을 펼치든 철학을 파고들든 학문을 붙잡든, 옳고 바른 우리 말로 사상과 철학과 학문을 하는 사람은 이 땅 이 나라 이 겨레에는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 자리를 파할 때쯤
 │
 │→ 자리를 끝낼 때쯤
 │→ 자리를 접을 때쯤
 │→ 자리를 마무리할 때쯤
 │→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쯤
 │→ 자리에서 일어날 때쯤
 └ …

한자말을 좋아한다면, "자리를 정리(整理)할 때쯤"으로 적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罷하다'를 쓰든 '整理하다'를 쓰든 똑같은 셈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더 마음을 기울여 알맞고 슬기롭게 글을 가다듬고자 한다면, '끝내다' 한 마디면 넉넉함을 헤아려야 합니다. 이런 다음 "자리를 접을 때"로 손질할 수 있고, "자리를 마무리할 때"로 손질할 수 있으며,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로 손질해 볼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을 담아내는 말그릇을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지를 가만히 생각할 노릇입니다. 내 뜻을 나누는 말틀을 어떻게 갈무리해야 한결 나을지를 차근차근 되짚을 노릇입니다. 내 마음을 살찌우고 이웃 마음을 함께 살찌우는 말결을 깊이있게 돌아볼 노릇입니다.

ㄷ. 학교가 파하다

.. 어느 날 오후 아미쉬 마을에 나갔다가 마침 학교가 파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아미쉬 어린이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  <임세근-단순하고 소박한 삶, 아미쉬로부터 배운다>(리수,2009) 257쪽

'오후(午後)'는 '낮'으로 다듬습니다. 그렇지만, '아침'과 '낮'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차츰 줄고, '오전(午前)'과 '오후'라는 한자말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나날이 늘고 있습니다. 한낮을 가리켜 '한낮'이라 하는 사람 또한 크게 줄었으며, '정오(正午)'라고만 해야 하는 줄 아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모른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깨우치지 않는다고 할 터입니다.

 ┌ 학교가 파하여 집으로 돌아가는
 │
 │→ 학교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 …

학교에서 교사들이 으레 "학교가 파하다"라고 말하다 보니, 이 말버릇이 아이들한테 옮고,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한테 옮습니다.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파하다'라는 말마디에 길들고, 어른이 되어도 이 말마디를 되풀이합니다.

이 말마디를 일제강점기부터 써 왔든, 우리 깜냥껏 우리 삶을 나타내고자 하는 자리에 쓴 낱말이 아니든 헤아리지 않습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익숙한 대로 말을 하고 글을 씁니다. 내가 익숙하게 쓰는 말이 왜 익숙하게 쓰는 말이 되었는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아니, 살필 까닭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냥 쓸 뿐입니다.

의사소통을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만, '의사소통(意思疏通)'이란 무엇이겠습니까. '意思'란 '뜻과 생각'이고, '疏通'이란 '흐름'입니다. 뜻과 생각이 잘 흐른다는 이야기요, 곧 '생각 나누기'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생각을 나누고자 말을 합니다. 생각을 나누고자 말을 하기 때문에, 내 생각만 내 마음껏 나타낼 수 없는 노릇이요, 내 생각을 들을 사람 눈높이를 찬찬히 살피면서 말을 할 노릇입니다. 듣는 쪽이 내 생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가를 살펴야 하며, 내가 내 생각을 얼마나 잘 담아내는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익숙한 말을 쓰는 우리들로서는 내가 으레 쓰는 말이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가를 살피지 않습니다.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듯 여기니까요. 아주 마땅히 써 왔고, 어른들이 말을 옳게 쓰는지 얄궂게 쓰는지 헤아리지 않으니까요.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잘못을 저지르지 말라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어른들 스스로 얄궂게 잘못 쓰는 말을 바로잡거나 가다듬지 않으니까요.

말잘못은 되풀이됩니다. 글잘못은 끊이지 않습니다. 말잘못은 그예 뿌리를 내립니다. 글잘못은 마치 말 문화인 듯 차츰차츰 굳어 갑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외마디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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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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