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츠이 야스다카의 <인간동물원>'인류학 서적이라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라는 생각이 먼저 스쳤다. 실제 책은 일본의 SF소설이다.
북스토리
어느 수업을 수강할 때였다. 강의계획서를 살펴보니 교재가 무려 7권이다. 대충 따져 봐도 가격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먼저, 그리고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이 그 뒤를 따른다.
이제 '실전' 정보 검색전을 시작할 때이다. 그리고 인터넷 사이트를 뒤적이다 '아싸'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입에서 튀어나왔다. <인간동물원>이란 책을 주문할 때였다. 어느 서점 사이트에서 이 책을 다른 사이트에 비해 무려 3천원이나 싸게 팔고 있었던 거다. 생각할 겨를도 없다. 내가 생각하는 사이에 품절되거나, 가격이 변동될 수도 있으니. 일단 주문 클릭!
며칠 후, 드디어 책이 도착했다. '아, 책이나 먼저 읽어둘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평소에 안 하던 예습을 왜 생각했을까 모르겠지만 일단 책을 펼쳤다. 우선 목차를 봐둬야 하지 않겠는가? '음~~' 각 장의 소제목들이 아주 그럴 듯하다. "나르시시즘, 욕구불만, 우월감, 사디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최면암시, 게젤샤프트, 게마인샤프트, 원시공산제, 의회제 민주주의, 매스 커뮤니케이션, 근대도시 …" 등등의 순으로 책이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몇 분 후였다. 두 번째 한 페이지를 읽고 있을 때 문득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밝고 명랑한 얼굴. 조금 못생기긴 했지만, 내 취향에 꼭 맞는 얼굴이었다. 눈 아래에는 주근깨까지 적당히 깔려 있었다. 서몬 핑크빛의 도톰한 입술은 내 가슴을 마구 고동치게 했다. 촌스런 가정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이 그녀의 멋진 육체를 감출 수는 없었다. ○○은 그다지 크게 부풀어 오르진 않았지만 …"― 츠츠이 야스다카, 양억관 옮김, <인간 동물원>, 북스토리, 2004, p.10.'○○○ 선생님이 이 책을 왜 교재로 선택했지?'라는 생각이었다. 도무지 평소에 알던 교수님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 책이었다. 한 페이지 더, 한 페이지 더 …, 하지만 이상하다는 생각은 줄어들기는커녕 점점 늘어갔다. '분명 도시와 관련된 인류학 서적이라고 했는데 뭔가 이상하다.' 뭐, 이것도 인류학이라면 인류학이겠지만 아무튼 뭔가 이상했다.
성(性)과 관련된 발언은 끔찍이도 싫어하시는 분이 이런 책을 왜 선택했는지 이해가 안 갈만큼 책의 내용이 섹시한 것이었다. 몇 페이지 더 넘기니, 노골적인 성적 표현들이 등장한다. '아, 이거 정말 뭔가 이상하다. 아니면 사람이 변했던가'라는 생각이 든 건 채 몇 페이지를 더 넘기기도 전이었다.
아뿔싸! 강의계획서를 다시 살펴보니, 교수님이 선택한 교재가 <인간 동물원>인 것은 맞다. 문제는 교수님이 선택한 교재가 전혀 다른 저자가 쓴 책이라는 데 있었다.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Morris)라는 영국의 동물학 박사가 쓴 <인간 동물원>이 강의계획서에 올라와있는 교재였는데, 츠츠이 야스다카(筒井康隆)라는 일본의 소설가가 쓴 같은 제목의 SF 단편집을 잘못 구입한 것이었다.
부화뇌동, 그러나 또 하나의 즐거움을 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