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방에 세 마리 꿩을 잡자' 그녀의 제안은 탁월했다

[역사소설 민회빈강6] 화살 하나로 세 마리의 꿩을 잡은 여인

등록 2010.03.06 15:43수정 2010.03.2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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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관 소현세자가 생활했던 곳. 현재는 심양아동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이정근


세자의 새로운 거처를 본국에서는 심양관이라 호칭했으나 청나라 아문에서는 고려관이라 불렀다. 국왕이 항복했으니 조선반도에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다는 뜻이다. 이에 아랑곳 하지 않고 현지에 주재하는 관원들은 세자관이라 불렀다. 역관 정명수가 세자관을 찾아 왔다.

"세자가 이곳에 들어온 지가 언제인데 아직 생업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이해할 수 없소. 제고산과 제왕들도 다 자기의 힘으로 먹고 사는데 이곳만 어찌 식량을 계속해서 대줄 수 있겠소? 경작할 땅을 줄 터이니 내년부터 농사를 지어 먹도록 하시오."


고압적인 명령조다. 명나라와 전투를 치르며 군량미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나라가 세자관에 공급하던 식량을 끊겠다는 것이다. 대륙정복의 첫 희생양이 된 몽고왕은 청나라에 항복한 후 30여명의 시종을 거느리고 식량을 자급자족하며 조용히 살고 있었다.

"우리에게 농사를 지어 먹어라 하니 황망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소. 대국이 소국에서 속공해온 볼모를 먹이지 못하고 스스로 경작하여 먹게 한다면 이웃나라에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황제께서 이 일을 아신다면 후세의 부끄러움을 생각해서라도 거두어들일 것이오."

세자가 '먹이지도 못할 인질은 왜 잡아 왔느냐?'며 완곡하게 항의했다. 세자관에는 한성을 떠나올 때 공식 수행원 193명을 비롯하여 중도에서 자원한 무과 급제자 박사명과 최득남, 만포 출신 사과(司果) 김충선, 서흥 아전 김대업 등 2백여 명과 허드렛일을 하는 노비 100여명,  도합 300여명에 이르는 대식구였다.

잡아왔으나 먹이는 일이 걱정이었다

청나라는 세자를 호종한 관원들이 세자가 심양에 도착하면 소수 인원만 남고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예상을 깨고 300여명에 가까운 인원이 주저앉아 있으니 대명 전쟁을 치르는 청나라로서는 부담스러웠다.


"황제의 명으로 경작할 땅을 이미 세 군데 정해 두었소. 준비에 차질 없도록 하시오."
사뭇 위압적인 일방통고를 마친 정명수가 돌아갔다.

"아니, 저놈이 조선 놈인 것 같은데 세자저하께 저렇게 방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정뇌경이 입술을 부르르 떨었다. 강화조약에 의거 세자가 볼모의 몸으로 한성을 출발할 때, 모든 신하들이 심양으로 떠나기를 주저했지만 자진해서 따라나선 사람은 세자빈의 오라비 강문명과 필선 정뇌경 단 두 사람뿐이었다. 


"평안도 은산에서 천출(賤出)로 태어나 관아에서 하인 노릇을 하다 강홍립장군이 명나라의 요청으로 대청전쟁에 출정하자 따라나섰다가 포로가 되어 역관이 된 자입니다."
평안도의 흐름을 한 눈에 꿰고 있는 신득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축하성 땐 전하를 능멸했던 놈이고 영의정에게 발길질을 했던 놈입니다."
"이런 찢어죽일 놈이 있나."
분기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천하의 매국노입니다."
빈객 박노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런 놈 발치에 머리를 조아리는 조정대신들이 있다는 것이 한심한 일입니다."
강효원의 두 눈에 핏발이 섰다.

"영의정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인데 저런 놈한테 아첨을 떨었다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입니다.
정명수 성토로 시작했으나 결국은 조국의 현실을 한탄하는 자탄으로 끝났다.

삼전도에서 조선 임금의 항복을 받아 낸 청나라는 군사를 철수할 때 수많은 포로를 끌고 갔다. 그 포로 중에 영의정 김류의 첩이 낳은 딸이 끼어 있었다. 자신의 서녀를 빼내려는 김류가 용골대에게 부탁했으나 거절당하자 정명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이제 판사(判事)와 우리는 한 집안이니 공(公)이 청하는 바를 내가 어찌 따르지 않겠습니까. 내 딸이 속바치고 돌아오도록 힘써주시오.'라며 애걸했으나 돌아온 것은 발길질이었다.

소현은 재신들을 소집하여 대책을 협의했다. 거절하자는 중론이 우세했다. 농사 자체도 어려운 일이지만 농사를 짓게 되면 고국에 돌아갈 날이 점점 멀어지고 어쩌면 뼈를 심양에 묻어야 한다는 우려가 팽배했다. 소현은 세자 이사 이경석으로 하여금 호부(戶部)를 방문하여 세자관의 입장을 전달하라 명했다.

농사는 고려관에서 알아서 하시오

"대국의 은덕을 후하게 입어 폐를 끼친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허나, 우리나라의 인적자원은 전후에 걸쳐 군병을 조발하고 군량을 운송하는데 이미 바닥이 났으니 농군부역을 동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또한, 기후가 다르고 농사법도 달라 농사를 지어 그 쌀을 먹게 될지도 자신할 수 없습니다."

"한인(漢人)은 농사일에 익숙하고 그들을 사는 것은 조선인과 달라 열 냥이면 살 수 있는데 어찌 그들을 사서 농사를 지을 생각은 하지 않는 거요?"

"관중에 자금이 말라 노예를 살 돈이 없습니다. 그들을 사서 농사를 짓는다 해도 그들이 힘써 농사를 짓는다고 기대할 수 없으며 흉년을 만나면 또 어떻게 하겠습니까?"

"흉년이란 하늘에서 알아서 하는 일, 별것을 걱정하시오. 일 없소. 본국에서 농군을 데려다 농사를 짓든, 한인을 사서 농사를 짓든, 그것은 고려관에서 알아서 하시오."

"본국에서 농군을 뽑아오는 일은 결단코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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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보 심양 교외의 평야지대 ⓒ 이정근


"경작은 이미 정해졌으니 이제 거스르기 어렵소. 야리강에 100일 갈이, 사하보에 150일 갈이, 사을고 근처에 150일 갈이를 준비해 두었으니 내년 봄부터 농사를 짓도록 하시오."

100일 갈이는 한 사람이 100일 동안 농사를 지어야 할 넓이의 농토를 말한다. 청나라의 방침은 확고부동했다. 명나라와 마지막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 청나라는 군량미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이 들었다. 여분이 없으니 '직접 농사 지어 먹어라.'는 것이었다. 돌아 온 이경석으로부터 보고를 받은 소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청나라에서 식량공급을 중단하면 큰 걱정이다. 그렇다고 곤궁한 본국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없다. 식솔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서라면 농사를 지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귀국 날짜가 한없이 멀어질까봐 그것이 염려스럽다. 이 일을 어찌할꼬?'

"저하! 무슨 심려라도 계십니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소현 옆자리에서 세자빈이 소곤거렸다.

"저들이 농사를 지어 먹으라 하니 지을 수도 없고 아니 지을 수도 없어서 걱정이오."

"차라리 잘 되었습니다. 저들 아문에서 주는 식량과 반찬을 받아먹으려니 몹시 언짢았는데 직접 농사를 지어 먹으라 하면 잘 된 일이지요."

세자빈의 입에서 뜻밖의 답이 튀어나왔다. 귀국 날자가 멀어질까봐 얼음 창고 짓는 것도 반대하던 세자빈이었는데 의외였다.

화살 하나에 세 마리의 꿩을 잡을 수 있습니다

"본국 사정으로 보아 농군을 들여올 입장도 되지 못하는데 어떻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단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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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탑 포로들이 매매되던 곳이다 ⓒ 이정근


"남탑 시장에서 노예들이 매매 된다 들었습니다. 거기에서 조선인 포로를 사들여 농사를 지으면 동포들도 좋고 소출도 좋을 것입니다."

기막힌 발상이었다. 노예시장에서 매매되어 혹사당하고 있는 포로들은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노역에 종사하고 있었다. 폭력과 성폭력은 일상화되었다. 학대에 시달리는 그들은 기회를 엿보다 틈이 보이면 도망쳤다. 그들의 탈주는 조선 조정에 악재로 작용했다. 추포하여 쇄환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포로들을 사들여 농사를 짓게 하면 동포들도 좋고, 세자관도 좋고, 조정도 편안해져 일석삼조라는 것이다.

세자빈 주도하에 본국에서 씨앗과 농사전문가를 들여왔다. 남자 포로 한 명에 30냥씩 11명을 사들이고 여자 포로 1명을 25냥에 인수하여 농사를 지었다. 둔소 책임자도 정했다. 노가새 둔감에 전 첨지 이정남, 사을고에 전 수문장 김성일, 왕부촌에 전 참봉 백여욱에게 책임을 지워 농사를 지은 결과 25섬 13말의 씨앗을 뿌려 932섬 4말 2되를 거두어 들였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가능성이 보였다.
#소현세자 #민회빈 #심양관 #병자호란 #청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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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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