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3)

멈춰버린 시간

등록 2010.03.08 11:28수정 2010.03.0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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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줄거리

미대생 수연은 도서관에서 아르헨티나 문화에 관한 책을 읽다가 책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책 속에서 탱고의 발상지 보카를 찾아가고, 자신이 만든 가상의 인물 페드로를 찾으려 애쓴다. 이 과정에서 예지력을 가진 꼬마에게서 의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의 연인인 미술 선생이 이 꼬마와도 연결돼 있다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꼬마는 항구에 있던 남자들에게 페드로의 행방을 물으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3. 멈춰버린 사람들

 

"어이! 내일은 우리 집 마당에서 바베큐 파티 한 번 하자고!"

 

항구 쪽 바닥에 앉은 남자들이 땀을 닦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정어리 냄새만 맡다 보니까 고기 굽는 냄새가 막 그리워지는걸! 내가 갈 때 와인 한 병 가져가지. 지난주에 포도밭에서 일해 주고 받은 품삯이라구!"

"이제 슬슬 여름이 오려나 봐. 아사도가 생각나는 것 보면 말야."

 

햇볕이 따스한 여름 항구에서 남자들이 나누는 대화는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진다. 

 

'아사도... 아사도란 말이지? 가만있어 보자...4 7 페이지에 잠깐 나왔었는데... 가만, 가만... 오호! 여기 있군.'

 

아사도(asado)는 쇠고기가 워낙 흔하고 싼 이 나라의 특성이 잘 배어 있는 음식이다. 여름 저녁, 가족과 이웃이 마당에 모여서 구워먹는 바비큐 요리로서, 숯불이 뭉근히 사그라들 시점부터 고기를 불에 올려서 거의 3시간 정도 구운 후 먹는 것이 특징이다. 숯과 장작의 종류에 따라 고기의 맛이 바뀌고, 부위별로 익는 시간도 다르다. 그래서 익은 부분부터 식탁에 가져 와서 와인과 곁들여서 오랜 시간 동안 먹는다. 그 가운데 이야기가 무르익고 가족과 이웃 간의 정이 싹튼다. 또한 아르헨티나의 느긋한 식문화는 그들의 국민성으로 이어진다. 그 가운데에서 탱고가 발달한 것이다.

 

'다들 좀 험상궂게 생겼지만 괜찮겠지.'

 

나는 그들 곁으로 천천히 다가선다. 다리를 쭉 뻗고 앉았던 남자 하나가 흘낏 쳐다보곤 고개를 갸우뚱한다.

 

"저.. 페드로씨가 여기 계신가요?"

"누구시오?"

 

나이가 지긋해 뵈는 흰머리 영감이 한마디 거든다.

 

"저.. 그러니까..책을 보고 왔어요. 제가 지금 학교 도서관에 있거든요. 그러니까.. 지금 여기 있는 저 말고.. 그니까 진짜 저는.. 도서관에서 아르헨티나 문화에 대해 책을.."

"아, 골치 아파. 저기 뒤쪽 창고에 페르도가 일하고 있다오."

 

젊은 사내 하나가 하품을 하며 벌러덩 나무상자에 기대 눕는다. 귀찮으니까 빨리 가달라는 소리 같다.

 

"네,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발길을 창고 쪽으로 돌리려는 순간, 그 중 한 남자가 바람 같이 달려온다.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아가씨."

 

선한 눈매의 그는 엉클어진 곱슬머리를 쓸어올리며 친절하게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믿어도 괜찮다는 무언의 의미를 담은 표정으로 곁에서 걷고 있다. 창고까지는 조금 긴 거리다.어색해지려는 이 기분.

 

"보카에 처음 오셨나요?"

"예."

"그러셨군요. 여긴 참 아름다운 곳이죠. 구경거리도 많고요."

"아....예. 참 예쁜 곳이라고 생각하던 참이었어요."

 

그러자 그는 한 층 들뜨고 신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지금 여긴 많은 공예가와 미술가들의 시장이 되었어요. 갤러리, 탱고 쇼, 행위예술이 항상 펼쳐지는 곳이죠. 그래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는 역동적인 곳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옛날과 다름없이 정어리 캔을 만들고 포장하죠. 항구에서 그 캔을 담은 나무 상자를 종일 나르다 보면 하루가 다 가버려요.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모두들 그렇게 살아오셨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지만 다들 만족하고 살아요.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고 문화는 발전하겠지만 여기 사람들이 가진 시간은 항상 반복이니까요."

"그건 무슨 말이죠?"

"아, 모르셨군요. 여기 보카 사람들은 아무리 나이 먹어도 죽지 않아요. 그리고 평생을 똑같은 생각과 생활을 반복하며 살죠.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한 시절 속에서 살아간답니다. 그 전의 기억이나 그 후의 기억은 필요 없어요. 세상의 변화는 물론 있어요. 하지만 마음은 항상 과거의 한 시대를 살고 있는 거죠. 마음 속 시간의 흐름이 끊겼다고나 할까? 그리고 우리 조상님들은 지금 각자 다른 시간 속을 여행하고 계실 뿐, 돌아가신 건 아니거든요."

 

남자의 말은 다소 이해하기가 힘든 부분도 있다. 적어도 내가 예상한 것과는 차이가 있단말이다. 나는 이곳이 내 의지대로 되는 영토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닌것만 같다.

 

"그... 그럼 지금은 몇 년도 인가요?"

"그거야 당신이 살다가 온 곳, 그곳과 같은 2010년이죠."

 

남자는 어깨에 묻은 흙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리곤 싱긋 웃으며

 

"하지만 아가씨가 들어온 보카는 다른 사람들의 보카와는 달라요. 아가씨 마음에 있는 단 하나의 보카인 거죠. 그러니 남들이 알고 있는 그 곳과는 다른 곳이랍니다."

"점점 모르겠네요. 그럼 이곳은 제 마음의 고향.. 뭐 그런 곳인가요? 제가 간절히 바라던. ..제가 생각하는 이상향 같은.."

 

남자는 얼굴을 들어 내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한다.

 

"예. 이해력이 빠르시군요."

"그런데 왜 하필 이곳이 제 마음의 고향인 걸까요?"

"그건 이제부터 차츰 알아가게 될 겁니다."

 

남자는 신념이 담긴 얼굴로 나를 응시한다.

 

창고 앞에 다다르자 남자는 삐걱이는 문을 열고 어두운 내부로 안내한다. 밝은 햇살 속에 있다가 어둠 안으로 들어오자 바로 코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컴컴하다. 도저히 그 어느 곳으로도 도망가지 못한 비린내만이 조용히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규칙적으로 울려 퍼지는 기계의 울림만이 유달리 크게 들리고 있을 뿐 너무나 조용한 실내다. 남자가 한 발짝 앞으로 가는 듯 하다. 그리고 익숙하게 안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페르도! 손님이 오셨어! 이번엔 아가씨야."

 

<계속>

2010.03.08 11:28 ⓒ 2010 OhmyNews
#아르헨티나 #보카 #아사도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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