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의 김범우, 100년 된 배나무로 환생?

[바이크올레꾼 길 따라 남도마을여행 25] 낙안면 신기리 김치용씨 배나무

등록 2010.03.09 10:13수정 2010.03.09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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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벌교읍 봉림리에 있는 <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의 집, 원래 대지주인 김씨집안의 집이었다 ⓒ 서정일

보성군 벌교읍 봉림리에 있는 <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의 집, 원래 대지주인 김씨집안의 집이었다 ⓒ 서정일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봉림리 언덕, 아래로는 홍교가 바라다 보이고 위로는 징광산을 마주하고 있는 곳에 소설 <태백산맥>에서 김범우집이라 묘사된 대저택이 있다.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라는 표현 그대로 어른 키 두 배 정도의 높이로 견고하게 쌓아올린 담장은 집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철옹성을 이루고 있다. 더구나 안방까지 가는데도 계단을 세 차례나 거쳐야 할 만큼 멀다.

 

이 집은 원래 이 지역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 소유의 집이다. 소설에서는 품격 있고 양식을 갖춘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그려지고 있다. 김범우는 이 저택을 중심으로 좌우익의 중심점을 잡아주는 민족주의자로 나온다.

 

그런데 소설과 실화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하고 있는 <태백산맥>을 보면서 과연 김범우라는 인물이 존재했을까 하는 궁금증을 갖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결론을 말한다면 알 수 없다. 작가가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인지 진짜인지 아리송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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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시 낙안면 신기리의 김치용씨 배농장, 선조가 100여년 전에 심어놓은 배를 정성스럽게 가꾸고 있다 ⓒ 서정일

순천시 낙안면 신기리의 김치용씨 배농장, 선조가 100여년 전에 심어놓은 배를 정성스럽게 가꾸고 있다 ⓒ 서정일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났건만 하늘은 구름 사이로 살짝 봄을 보여주기만 할 뿐 여전히 추운 겨울이다. 더구나 씽씽 불어오는 바람은 바이크를 타고 다니는 필자의 가슴을 시리게 하고 오금을 저리게 만든다. 그래서 아직도 겨울옷 그대로다.

 

그런데 필자보다 나이는 두 배나 많으면서도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얇은 봄옷으로 단장하고 있는 것이 있다. 벌교 김범우의 집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순천시 낙안면 신기리에 있는 김치용씨의 100년 된 배나무가 그것인데 차가운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어도 꿋꿋하게 새순을 뿜어내고 있다.

 

1세기 동안 매년 봄이 되면 배꽃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나무, 밑 둥지가 어른 한 아름은 되고 파르스름한 이끼를 몸에 걸친 튼실한 뿌리는 사방으로 내리 뻗어있다. 이렇게 오래된 배나무는 전국적으로도 흔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김치용씨 배 농장에는 무려 80여 그루나 된다.

 

원래 이 지역에 100여년 된 배나무가 있던 집은 김씨네 농장 말고도 두 곳이 더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도중에 모두 개목(改木-나무를 갈아엎고 새로 심은 것)을 해 사라지고 김씨네 배농장만 심을 당시 그대로 접목만 붙여 배를 생산해 내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농장의 주인인 김치용씨의 증조할아버지가 <소설 태백산맥>에서 김범우집의 원 주인이었고 김씨의 할아버지도 그곳에서 태어나고 살았으며 그 할아버지가 심은 배나무가 바로 지금의 배나무라는 것이다.

 

김범우집 안내판에 새겨진 '이 집은 원래 이 지역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 소유의 집'이라는 그 주인공격인 사람을 만난 것이다. <태백산맥>이 허구라고 하지만 허구가 아니고 사실인 듯 하지만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즐거운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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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김치용씨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 집, (우) 김치용씨가 100년 된 배나무에서 움이 트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 서정일

(좌) 김치용씨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 집, (우) 김치용씨가 100년 된 배나무에서 움이 트고 있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 서정일

반갑기도 하고 호기심도 발동해 소설속의 인물인 김범우를 김씨의 할아버지나 증조할아버지에 대입해 풀어보겠다고 김치용씨에게 여러 질문을 해댔지만 김씨는 "허구일 수도 있고 사실일 수도 있다"는 아리송한 말만 남기고 "만약 김범우를 찾아보려면 저 배나무에서 찾아보라"고 100년 된 배나무를 가리킨다.

 

도대체 배나무와 김범우는 뭔 관련이 있기에 그곳에서 그를 찾아보라는 말일까?

 

김씨는 "적어도 지금 김범우집이라고 알려진 곳을 증조할아버지가 짓고 할아버지가 살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몰락해 남의 집이 됐기에 그곳에 김범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고 말한 뒤 "그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이곳에 배나무를 심었고 후손인 내가 기르고 있으니 나는 이 배나무에 김범우의 사상이 살아있고 이 배나무가 김범우라 생각한다"며 조상과의 유일한 끈으로 또 선조가 남겨놓은 유일한 살아있는 생물로 배나무를 아끼고 돌본다고 말한다. 

 

'온화한 애정' 이것은 배나무의 꽃말이다. 그리고 봄이면 하얀 꽃잎을 피워내고 있다.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던 그 무렵부터 100년 동안 백의민족같이 하얀 꽃을 피워낸 김씨네 배나무,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조국을 온화한 애정으로 바라봤던 김범우가 배나무로 환생하고 100년 동안 이 지역에 배꽃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김범우를 만나고 싶은가? 그러면 낙안면 신기리의 김치용씨 농장으로 가면 된다.

덧붙이는 글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바이크올레꾼 #김치용 #김범우 #태백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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