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9)

분노가 담긴 술

등록 2010.03.17 15:14수정 2010.03.17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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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줄거리

수연 일행은 버스를 타고 길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서 보카 항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항구 근처의 클럽 '멘도사'에 식사를 하러 들렀다가 그곳에서 인형머리를 한 웨이터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된다.그리고 여러 사연을 가진 사람이 어울려서 음악과 춤을 즐기는 이 클럽의 분위기에 매료된다.

 

9. 분노가 담긴 술

 

인형 웨이터가 사라진 후 우리 일행은 음식을 기다리며 착한 아이들 마냥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비오는 창밖 모습과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의 춤사위를 구경하며 악단이 연주하는 곡을 듣고 있었다. 한동안 모두들 넋이 빠진 기분이었다.

 

"아르헨티나는 먹을 게 참 풍부한가 봐요. 손님들 식탁이 전부 화려하군요. 고기도, 곡물도 모두 기름이 흐르는 것 같고.... 제기랄! 겉모양만 번지르 하면 뭘해! 그건 남자들도 마찬가지 사항이지! 허우대 좋아봐야 인물값 더럽게 하잖아! 에잇, 퉷!"

 

아가씨는 혼자 화를 내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좋은 기분으로 흥겹게 즐겨요. 이곳까지 온 것에는 당신의 정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겠어요? 모두들 자신의 마음 속 우물만 깊다고 하면서 남의 우물은 들여다 볼 생각을 않는 게 탈이지요. 어디로 피하려고 하지 말고 이곳에서 당신의 또 다른 자아를 찾아서 편히 쉬어 봐요. 그러면 현실로 돌아갔을 때 당신은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요."

 

운전사가 부드럽게 타이르며 아가씨의 어깨를 토닥여준다. 제법 연륜이 있어서인지 그의 한마디는 실로 효과가 있었다. 아가씨는 다소 완화된 얼굴로 표정이 바뀌었고 훌쩍이며 코를 풀더니 이내 음악에 심취했다.

 

"어이, 페르도 아냐? 나 보러 온 거야?"

 

그때 여자 하나가 가슴이 잔뜩 파인 옷을 입고 우리 테이블로 왔다.

 

"아, 멜레나... 내가 모시고 온 손님들이야. 이번엔 3명인데 다들 여자 분이군."

"그러게나 말야, 게다가 젊고 싱싱한 아가씨가 둘씩이라니! 샘나는 걸?"

 

페르도는 사람들을 하나씩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에 머리 긴 아가씨는 수연씨, 여기 초록색 펑크 머리 아가씬 이름이..."

"조제! 난 그 이름이 좋아요. 난 조제라고 불러줘요. 내가 좋아하는 영화 주인공 이거든. 우울하지만 개척정신이 있는 여자라구요."

 

아가씨가 대뜸 나서서 거든다.

 

"아..그렇군요. 조제! 그리고 할머니는 '뜨개질 할머니'라고 불러드릴게요. 그리고 우리의 기사 아저씨는 잘 알테고..여러분들! 이쪽은.."

 

페르도가 여자를 소개하려고 하자 이번엔 여자가 얼른 나서더니

 

"난 멜레나! 여기서 탱고를 춰요. 페르도와는 애인 사이라고나 할까? 안 그래, 자기?"

 

하더니 혼자서 허리까지 젖혀가며 정신없이 웃는다. 그럴 때마다 큰 가슴이 사정없이 출렁거린다.

 

"이..이봐. 그러다가 '흰갈매기'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페르도가 그녀를 나무라자 "들으라지, 뭐! 지까짓 게 골목에서 조무래기들한테나 엄포를 놓을 일이지 여기까지 와서 간섭할 일은 아니잖아. 내가 지 마누라도 아니고 그냥 갖고 놀다가 버리는 여자 중의 하나일 뿐인데, 아무 상관없는 것 아니냐고!"

 

멜레나는 이미 술이 반쯤은 취해있던 탓에 얼굴이 울그락 불그락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다가 때마침 인형 웨이터가 갖고 온 술 까지 단숨에 벌컥 들이킨다.

 

"멜레나, 왜그랭? 삐쳤엉? 오늘 술 먹고 춤추면 더 볼만하겠지만 많이 마시지마, 우리 이쁜이."

 

인형 웨이터의 느끼한 아양에 멜레나는 힐끗 보며 허탈한 쓴웃음을 짓는다.

 

"어허, 멜레나. 당신 공연이 곧 시작인데 그래갖고 되겠어요? 어서 일어서서 준비해요. 조제! 당신도 부축 좀 해봐요."

 

기사 아저씨가 타이르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인형 웨이터가 두세 번에 걸쳐서 가져온 음식은 눈앞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푸짐했다. 튀긴 소고기에 치즈를 듬뿍 올리고 소스를 뿌려 나오는 밀라네사와 미탐브레는 고기 피자처럼 쫄깃하고 고소했다.  소고기와 닭고기를 저며서 야채를 섞어 구운 엔파나다 역시 푸짐한 양과 향으로 입맛을 다시게 해서 정신없이 먹었다. 게다가 곁들여 나오는 감자 샐러드와 옥수수 구이는 보는 것 보다는 먹어봐야 그 진미를 알 수 있는 요리였다.

 

"여기 한잔씩들 들어가며 먹어요."

 

페르도가 술을 따라주며 말한다.

 

"이건 이 지역의 비밀 주조법으로 만들어진 술이죠. 마시면 아주 근사한 풀밭에 드러누워서 하늘을 우러러보는 기분이 들거에요. 아무런 근심 걱정도 없는 일요일 오후의 느긋한 한때, 목장의 젖소 울음소리가 멀리서 바람을 타고 넘어오고 가벼운 꽃향기에 이끌려서 마구 가슴이 뛰는, 그런 맑은 날의 바람과 공기가 느껴진답니다."

 

"정말이에요? 어떤 만화쟁이가 와인에서 그런 느낌이 난다고 해서 마구 코웃음 친 판국에 이건 또 뭔소리야?"

 

조제는 슬그머니 다가가서 술병을 기울여본다. 초록색의 맑은 술이 병에 가득 담겨져 있다. 병을 약간 기울이자 에메랄드 그린의 술 색깔이 신비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색깔만 봐서는 꼭 압생트 같네요. 많은 예술가들에게 작품의 영감을 준 술이죠. 푸른색의 풀로 만든 술."

 

나는 매료된 눈빛으로 병을 바라보며 말했다. 페르도 역시 그 병 쪽으로 얼굴을 갖다 대더니 말을 이었다.

 

"이건...죽은 자의 분노를 넣어서 만든 술이죠."

"에이구머니나!"

 

뜨개질 할머니는 너무 놀라서 입에 든 음식 까지 뱉어냈다.

 

"죽은 자의 분노를 어떻게 여기다 넣어요? 너무 추상적이다. 말도 안돼."

 

나는 한편으론 궁금하지만 입을 샐쭉이며  그 말을 무시했다.

 

"어떻게 넣냐구요? 분노를 추출하는 기계가 저 방에 있답니다. 그 기계로 죽은 자의 분노를 용해시켜서 여기에 넣는 거죠. 이 분의 분노는 초록빛이 나는 군요. 이렇게 숙성된 분노는 오랜 시간이 흐를 수록 평온으로 변하게 되죠. 그래서 결국에는 세상 그 어느곳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안식과 평화를 가진 술이 된답니다"

 

페르도는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곤 음식을 입에다 쑤셔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이건 뭐! 완전 괴기 영화 같잖아. 이봐요, 당신! 이따위 웃기지도 않는 소리 하려고 우릴 여기로 끌어 들인 거였어?"

 

조제는 들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에 '챙강' 집어던지며 일어섰다.

 

<계속>

2010.03.17 15:14 ⓒ 2010 OhmyNews
#아르헨티나 #보카 #압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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