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302) 교과서적

― '교과서적이고 엄격한 고향의 세계' 다듬기

등록 2010.03.19 19:29수정 2010.03.19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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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과서적이고 엄격한

 

.. 교과서적이고 엄격한 고향의 세계와, 퇴폐적이고 방종한 대학의 세계 사이에서 나는 고뇌했다 ..  <곽아람-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아트북스,2009) 187쪽

 

"엄하고 철저하다"를 뜻하는 한자말 '엄격(嚴格)하다'인데, '엄하다'는 "철저하고 바르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말풀이가 서로 겹칩니다. '철저(徹底)하다'는 "빈틈이나 모자람이 없다"를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엄격한'이란 "빈틈없이 바른"을 가리키는 셈인데, 우리 말로 하자면 '깐깐하다'나 '꼼꼼없다'쯤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고향의 세계"는 "고향 세계"나 '고향'으로 다듬습니다. "퇴폐적(頹廢的)이고 방종(放縱)한"은 "지저분하고 어수선한"이나 "어지럽고 제멋대로인"으로 손보고, "대학의 세계"는 "대학 세계"나 '대학'으로 손봅니다. '고뇌(苦惱)했다'는 '괴로워했다'로 손질합니다. 한자말 '고뇌'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괴로워하고 번뇌함"으로 풀이되어 있는데, '번뇌'는 "마음이 시달려서 괴로워함"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이 또한 겹치기 말풀이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고뇌'이든 '번뇌'이든 '괴로움'이란 소리요, '고달픔'이나 '힘겨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 교과서적(敎科書的)

 │  (1) 해당 분야에서 모범이 되는

 │   - 시민운동의 교과서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 /

 │     교과서적인 삶은 우리 시대에 없는 것이 아닐까

 │  (2) 판에 박혀서 현실적이지 않은

 │   - 교과서적 원칙보다는 상황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

 │     고정 관념이나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

 ├ 교과서적이고 엄격한 고향의 세계

 │→ 교과서 같고 엄격한 고향 세계

 │→ 틀에 박히고 깐깐한 고향

 │→ 판에 박히고 갑갑한 고향

 └ …

 

국어사전에 나오는 '교과서적'은 두 가지 쓰임새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모범이 되는"이요, 둘째는 "판에 박힌"입니다. 한 낱말을 놓고 엇갈리는 두 가지 쓰임새가 있는 때가 또 있을까 궁금한데, 엇갈리는 쓰임새가 없으란 법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들이 '교과서적'이라고 하는 말투를 꼭 써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 같은 말투가 없다면 우리 생각을 나타낼 길이 없고, 이 같은 말투가 아니라면 내 느낌을 나눌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무엇보다도 "교과서 같은"이나 "교과서다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 남을"이나 "교과서를 보는 듯한"이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교과서에서 다루는"이나 "교과서에 갇힌"이나 "교과서 울타리에 갇힌"이나 "교과서를 다루는 듯한"이나 "교과서에 얽매인"이라 이야기해도 잘 어울립니다. 자리에 따라서는 "교과서에나 나오는"이나 "교과서처럼"이나 "교과서에 읊듯이"라 할 수 있겠지요.

 

우리들은 '-的'이라고 하는 말끝을 아무 자리에나 함부로 붙이면서 우리 깜냥껏 이야기를 나누는 틀을 잃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的'과 같은 말투에 얽매이면서 우리 슬기를 빛내며 우리 넋을 키우는 길을 우리 스스로 버리고 있습니다. "교과서에 갇힌" 꼴이라 할까요. "낡은 교과서를 붙잡는" 꼴이라 할까요. "좋은 교과서를 만들지 못하는" 꼴이라 할까요. "새로운 교과서를 엮지 않는" 꼴이라 할까요.

 

 ┌ 시민운동의 교과서적 사례로 남을 것이다

 │→ 시민운동에서 좋은 보기로 남으리라 본다

 │→ 시민운동에서 훌륭한 보기로 남으리라

 ├ 교과서적인 삶은 우리 시대에 없는 것이 아닐까

 │→ 교과서 같은 삶은 우리 시대에 없지 않을까

 │→ 반듯한 삶은 우리 둘레에 없지 않을까

 │→ 아름다운 삶은 우리 터전에 없지 않을까

 └ …

 

우리 스스로 훌륭한 길을 걷고자 하지 않으니, 우리 스스로 훌륭한 보기를 이루지 못합니다. 시민운동 판 스스로 훌륭한 길을 걷는다면 "시민운동이 이룬 훌륭한 보기"를 이루겠지요. 남 앞에 내보이려는 생각이 아닌 나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생각바탕이라 한다면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삶은 우리 둘레에 넉넉히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 다른 아름다움을 빛내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찾는 말이고, 스스로 찾는 삶입니다. 스스로 가꾸는 말이고, 스스로 가꾸는 삶입니다. 스스로 빛내는 말이며, 스스로 빛내는 삶입니다. 스스로 이끌어내는 말이며 스스로 이끌어내는 사랑입니다.

 

 ┌ 교과서적 원칙보다는 상황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 판에 박힌 잣대보다는 때에 따라 생각을 달리하는

 │→ 고리타분한 잣대보다는 그때그때 알맞게 맞추는

 ├ 고정 관념이나 교과서적인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으면

 │→ 굳은 생각이나 딱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 얽매인 생각이나 세상모르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 해묵거나 틀에 박힌 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

 └ …

 

생각이나 마음이나 넋이나 얼이 딱딱하게 굳지 않도록 애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말이며 글이며 따분하게 굳어버리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생각이 고리타분하니 말이 고리타분합니다. 삶이 케케묵으니 말이 케케묵습니다.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생각없는 삶이라 한다면 언제나 답답하고 갑갑한 삶이면서 답답하고 갑갑한 생각이자 말입니다. 어디에서 어떠한 일을 하면서 산달지라도 생각있는 삶일 때에는 열린 삶이면서 열린 말입니다. 깊은 삶이면서 깊은 말입니다. 넉넉한 삶이면서 넉넉한 말입니다.

 

고운 매무새로 살아가는 사람한테서 고운 생각과 말이 샘솟지 않는 모습이란 본 적이 없습니다. 얄궂은 몸가짐으로 살아가는 사람한테서 얄궂은 생각과 말이 배어나오는 모습이란 못 본 적이 없습니다.

 

스스로 아름답고자 한다면, 스스로 하는 일을 비롯하여 스스로 품는 생각과 꾸리는 삶과 펼치는 말 모두 아름다운 길로 접어들기 마련입니다. 어느 한 가지만 아름다울 수 없으며, 어느 한 가지만 아름답다면 거짓이나 겉치레이거나 겉핥기이거나 겉꾸밈입니다. 아름다운 밥과 옷과 집입니다. 아름다운 사랑과 믿음과 나눔입니다. 아름다운 이름과 힘과 돈입니다. 아름다운 손과 머리와 가슴입니다. 나란히 흐릅니다. 다 같이 움직입니다. 어깨동무하는 이음고리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3.19 19:29ⓒ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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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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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적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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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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