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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셋을 혼자 키우는 한부모 김씨는 집에 옷장 하나 없다. 사업을 실패하고도 신용카드로 무분별한 소비를 멈추지 않는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서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 부담 때문에 극도로 절제된 생활을 하고 있다. 아이들과 맘 편한 외식 한번 못 하면서 밤 늦게까지 학원강사로 일을 하는 김씨는 돈이 생기기만 하면 은행으로 달려간다.
지갑에 돈이 들어 있으면 불필요한 곳에 써버릴 위험이 있다는 생각으로 은행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통장을 하나 둘씩 늘려나갔다. 그러나 지난해 전세 집을 늘려 이사하려고 통장 잔액을 확인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펀드투자라는 것을 모르고 가입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상품을 권유했던 직원 말이 수익률이 높다고 했다. 그 직원은 김씨에게 대단히 친절했다. 재무설계까지 해주면서 아이들 교육비 마련과 노후준비를 위해 펀드와 변액보험을 추천해 주었다. 김씨는 그 때까지만 해도 은행에서 자신이 재무설계 서비스까지 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 잔액을 확인했을 때 금융시장은 미국발 금융위기를 겪고 있었고 재무설계 상담을 통해 가입한 펀드는 고수익은 커녕 반토막 상태였다.
다급한 마음에 은행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따져 물었으나 펀드 투자는 원래 그런 것이며 장기 투자하면서 수익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왜 그래야 하는냐는 질문에 직원이 무언가 열심히 설명을 해주었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다시 일년여가 흐른 지금 그 펀드상품들은 대부분 원금을 회복했다.
일 년이 지옥 같고 저축해 봐야 그렇게 황당하게 돈을 까먹나 싶어 그 일 년간은 저축할 의지 조차 들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공부방 하나라도 만들어 주려고 전세 확장을 하려 했으나 그것도 포기하고 그대로 눌러 앉아야만 했다.
재무설계는 투자 상품 판매를 위한 상술?2007년 주식시장의 활황시기 금융판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거의 광적이었다. 주가 3000을 부르짖으며 사람들의 마음에 투자하지 않으면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함을 심느라 여념이 없었다. 은행에서 증권사에서 심지어 보험회사와 금융상품 판매 대리인 등의 여러 금융판매인들은 때로 전문가로 때로 직접적인 영업 사원으로 많은 소비자들을 투자의 대열로 이끌었다.
마침 은행에서 방카슈랑스가 시행되고 보험사의 손·생보 판매 겸업과 펀드 판매 자격까지 주어지면서 금융회사 직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보험과 펀드 판매 실적 채우기에 급급했다. 저금리 시대 운운하며 재테크 선동을 하고 재무설계를 해준다며 소비자들에게 투자상품 과소비를 부추겼다.
애초 재무설계는 소득과 지출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어야 한다. 생애 현금흐름을 안정시키기 위해 과도한 투자를 경계하도록 위험을 적극적으로 인식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올바른 소비 예산을 수립하도록 도와주면서 균형잡힌 재정 구조 속에서 합리적인 자금관리를 하도록 조언을 해주는 작업이다. 그러나 금융회사에서 유행처럼 번진 재무설계는 판매를 위한 상술에 지나지 않았다. 소비 예산 수립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철학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거니와 연구와 학습조차 되지 않은 판매인들에 의해 소비자들로 하여금 재무설계=보험과 펀드 판매로 인식하게 만들기도 했다.
소비자들은 금융판매와 관련된 재무설계사를 만나면 저축여력의 대부분을 보험이나 펀드와 같은 장기 상품에 가입하는 오류를 범했다. 심지어 은행에서는 재무설계안으로 고객에게 내 집마련은 레버리지를 활용하라고까지 위험한 조언을 전문가인척 제시한다. 레버리지라는 말은 '지렛대'라는 말로 빚을 지렛대 삼아 큰 수익을 챙기는 투자 기법이다. 거주할 내 집을 사는데 빚을 지렛대 삼아 큰 수익을 내라니 도대체 앞뒤가 안 맞는 말을 재무설계안이라고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집은 빚내서 사는 것이 당연하다는 왜곡된 프레임을 퍼트리는 주범이 아닐 수 없다.
은행의 재무설계안 샘플을 한마디로 정리해보면 집은 빚내서 사고 교육비는 장기주택 마련 펀드로 해결하고 노후는 변액보험으로 하라는 결론이다. 그러한 단순하고 무지한 재무설계안을 제시하기 위해 해마다 은행에서는 국제 공인 재무설계사 자격시험(이름이 공인일 뿐, 실제로는 공인 자격이 아닌 민간 자격제도임)에 수많은 은행원들에게 응시료와 수강료를 지원해 주고 있다.
은행의 재무설계안은 판매자 입장에서는 한 고객에게서 보험과 펀드, 대출까지 다양한 실적을 원스톱으로 챙길 수 있는 환상적인 판매술이다. 은행뿐 아니라 보험회사 설계사 혹은 소위 중개 수수료가 수익구조의 90% 이상을 차지하는 GA의 설계사들 모두 이런 원스톱 판매 이익 매력으로 한 때 재무설계 비법 공부에 열을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사이 사례의 김씨와 같이 하루 하루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많은 소비자들이 금융상품으로 인해 돈을 까먹거나 중요한 재무적 의사결정을 포기해야만 했다.
양심적인 재무상담가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