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 소설] 동굴 속의 탱고(11)

열망 사냥꾼

등록 2010.03.22 11:18수정 2010.03.22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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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줄거리

수연 일행은 페르도가 준 분노의 술이 만들어진 경위를 듣게 된다. 죽은 자의 몸에서 추출한 분노로 술을 만들어서 마시면 마음이 평온해진다는 말에 할머니는 관심을 보인다. 탱고 공연이 무르익고 클럽 안이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을 때 그 분위기에 편승하여 할머니는 분노의 술을 마실 결심을 한다.

 

11. 열망 사냥꾼

 

잔에 따른 술은 더욱 짙어진 향으로 유혹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눈을 감고 그 향을 음미하더니 술을 천천히 들이켰다. 음악소리는 그런 할머니의 비장한 모습을 응원이라도 하는 양 점점 높아만 가고 있었다. 그리고 투명한 술잔에서 초록의 액체가 미끄러지듯이 할머니의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정점에 달했다.

 

"할머니, 괜찮아요?"

"으...응. 꽤 독하구나. 하지만 그럭저럭 견딜만해."

 

그리고 조용히 잔을 내려놓은 할머니는 의자에 기대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때 눈가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나는 보았다. 열심히 뜨개질만 하던 할머니에게도 마음속에는 무언가가 움트고 있었던 것이고, 젊은이 마냥 대놓고 해결하려고 들지 않았을 뿐 그녀에게도 삶은 하나의 도전 과제이면서 체념의 과제였던 것이다.

 

"난 말이야, 오래전에 잃어버린 자식이 있었어."

할머니는 의자에 기댄 채로 천장의 조명등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조명등은 '난 말야, 아주 오랜 시간 때가 쩔어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은 탓에 삶을 체념해 버렸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그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는 지극한 서러움이 세월에 응축된 형국이라고나 할지...

 

그리고 조명등은 할머니와 나를 내려다보며 우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할머니는 불빛 아래에서 조금은 슬퍼보였고,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두런두런 하다가 어느 틈에 잠이 들어버렸다.

 

비가 조금 그치고 있었다. 클럽 처마 밑에는 빗방울이 송송이 매달려서 떨어지고 있었고, 내게 어깨를 기댄 할머니는 어느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창밖에 일렬로 늘어선 가로등 아래서 절정과 도약의 몸짓을 보여주던 파도는 어느새 사라지고 차분한 물결의 일렁임이 해변을 보듬고 있었다.

 

그리고 페르도가 옆의 테이블에서 이야기를 마치고 다가왔다. 페르도의 어깨 너머로 곱슬머리가 눈인사를 했다. 나도 가벼운 목례로 화답하고 할머니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페르도를 향해서 "어쩔까요?'하는 무언의 의사표시를 했다.

 

"밖으로 나가고 싶으시죠? 할머닌 제게 기대게 하세요. 술기운이 작용하려면 한참 지나야 하니까요. 그 김에 조제도 한번 찾아보세요. 기사 아저씨는 이미 곯아떨어져서 뒷켠에서 주무시고 있답니다."

페르도는 할머니의 머리를 손으로 들고 나를 빼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 의자에 앉아서 분노의 술을 조금씩 음미하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어두운 방죽 길을 거닐며 조제를 찾아보았다. 밤에 들리는 기러기의 울음소리는 참으로 신비한 느낌을 준다. 뜨거운 여름 낮의 갈매기 울음소리가 열정과 희망을 의미 한다면, 한밤 중 비온 뒤에 듣는 갈매기 울음소리는 서라운드 티비 에서 울려 퍼지는 울림처럼 입체적이다.

 

"조제!-"

나는 바다를 향해서 소리를 질러보았다. 딱히 조제를 부른다기 보다는 내 속에 자리 잡은 격분을 토해내는 기분으로 목청껏 불러보았다. 그 순간 만큼은 그건 누군가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토악질이고, 발광인지도 몰랐다.

 

"조제!-"

어두운 섬 저편으로 울림은 묻혀버렸다.

토해내고 나니 조금 시원해진 속으로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 항구에 놓인 짐짝들 틈에서 조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너! 이리 와봐."

뭐야! 언제 봤다고 그 따위로 사람을 부르는 거야 싶어서 한참을 쏘아보는데 조제는 피투성이가 된 채로 짐짝 사이에서 일어섰다.

 

"조..조제! 무슨 일이에요? 왜 그래?"

조제는 희미하게 웃더니 손으로 어서 와보라는 시늉을 했다.

나는 달려가서 그녀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무슨 일인지 감을 잡으려 애썼다. 팔과 다리에서 사정없이 피가 흐르고 있었다.

 

"저기..저 바위 아래에 이상한 게 보이길래 뭔가 싶어서 살짝 물속으로 들어가 봤거든. 그런데 뭔가가 일렁일렁하는 거야. 그래서 물에다가 손을 넣어봤지. 그랬더니 뭔가가 나타나더니 확 물어뜯잖아. 제법 큰 고기만큼 사납고...."

"이런 해변가에 식인 상어라도 있었단 거에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고기는 아니었어. 분명히."

"몰라. 그런 건 나중에 말해요. 자꾸 움직이니까 피가 더 나와. 여기 기다려봐요. 내가 사람들을 불러올게."

 

나는 정신없이 클럽 멘도사로 돌아와서 페르도에게 알렸고 그는 사람들과 함께 해변으로 내려갔다. 잠시 뒤 페르도의 등에 업혀서 돌아온 그녀는 힘이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이 소동으로 클럽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우리 테이블로 몰려들었다.

 

"우선, 뒤켠 방에 데려다 놓을 테니 빨리 치료를 좀 해줘. 나는 약을 가져오겠어."

그는 빠르지만 정확하고 능숙하게 곱슬머리에게 말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곱슬머리와 나는 얼른 사람들 틈을 헤집고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꿈인데 뭐 어때요? 여기서 죽더라도 현실에선 깨어나는 것 아닌가요?"

조제는 희죽 웃으며 가늘게 눈을 뜨고 말했다. 하지만 고통이 있는 듯해 보였고 의식도 뚜렷하지 않았다.

 

곱슬머리는 의약품과 붕대로 지혈을 했고, 페르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지금은 말을 많이 하면 안돼요. 내가 다 말해 줄 테니 듣고만 있어요. 여기서 죽게 되면 현실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당신의 생명은 현실과 이곳이 연결되어 있답니다. 보카로 올 때 길고 긴 터널을 거쳐 왔지요? 그건 당신이 살아온 세월의 터널을 지나온 것이랍니다. 똑같은 터널을 지나왔지만 나이가 든 사람은 별로 길게 느끼지 않아요. 하지만 나이가 어릴수록 길고 지루하게 느끼는 거죠. 그 세월의 한 곳에서 우리와 함께 있는 것이고요. 여기서 죽게 되면 현실의 당신은 잠자다가 영원히 저 세상으로 떠나간 사람이 되는 거지요. "

 

세상에! 여기와서 죽는다면 얼마나 억울한가를 생각하니 화가 치밀었다. 페르도는 잠깐 숨을 쉰 후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죽으면 이곳에 오게 될 지 어떨지는 몰라요. 어느 다른 곳으로 가서 그 곳에 정착해서 살거나 아니면 지금 이곳의 기억을 다 잊은 채 전혀 다른 사람의 몸을 빌어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르지요. 혹은 사물에 이입 되어서 보카의 한 생명이 될 수도 있지요."

 

옆에 섰던 곱슬머리가 나직한 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왜 저렇게 되었나요?"

"해변에 이상한 게 갑자기 와서 물어뜯었대요. 물고기는 아닌 것 같다고 했어요."

나는 치를 떨며 겨우 입을 열었다.

 

그 말을 어느 새 들은 페르도는 순간 얼굴빛이 어두워지더니

"열망 사냥꾼의 짓인 것 같네요."

라며 머리를 숙였다.

 

" 그게 뭐죠?"

"이 지역에는 오래전부터 이놈이 설쳐대고 있지요. 남달리 열망이 강한 사람이 그놈의 표적이 되고요, 또 남달리 순수한 이성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들러붙어서 살점을 뜯고 피를 빨아먹는 답니다. 그놈에게 물어뜯기면 그 사람은 지독한 트라우마에 시달리지요. 그 트라우마가 그 사람의 열망을 서서히 갉아먹어요. 수혈을 당하듯 그의 몸에서는 희망, 꿈 같은 것이 사라져 가고 나중에는 빈 껍데기만 남아버리죠. 번데기 껍질 처럼요. 결국에는 살아있어도 그 사람은 재기 할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가 삶을 포기하게 되고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존재감을 잃은 채로 자살을 하거나 정신병자가 되어가지요."

 

"그..그럼 조제도요?'

나는 멍해진 얼굴로 물었다.

 

<계속>

2010.03.22 11:18ⓒ 2010 OhmyNews
#아르헨티나 #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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