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선생님, 의심해서 죄송해요"

[주장] 검찰은 제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들어달라

등록 2010.03.23 15:25수정 2010.03.23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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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예전에 쓰던 호칭대로 '한명숙 전 총리' 대신 선생님이라고 부르겠다. 처음 5만 달러 뇌물 사건이 터졌을 때 선생님을 의심했었다. 아무리 멀쩡한 생사람도 간첩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었던 검찰이지만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총리까지 지낸 분을 확실한 증거 없이 죄인취급을 하겠는가.

 

조금 짜증도 났다. 정치인은 위태롭게 교도소 담장을 걷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우스개처럼 돈 없이 정치 할 생각을 못 하는 건 세상이 다 알지만 그래도 그렇지 당신이 살아 온 궤적이 있는데 어떻게 그깟 몇 만 달러에 저 망신을 당하는가?

 

답답한 마음에 한명숙 선생님과 함께 여성운동에 청춘을 바쳤던 친구한테 전화를 했다.

 

"어떻게 된 일이니?"

"음… 선생님을 만났는데 후배들한테 부끄러운 짓은 절대 안 했으니 걱정 말라고 하시더라."

 

그 말에 조금 안심이 됐지만 그래도 찜찜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정치인에게 후원금은 생명줄이다. 든든한 후원자에게 몇 천 만 원 정도 후원금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대가성이다.

 

더구나 국회의원도 아닌 행정 수뇌부가 무슨 정치자금이 필요할까? 몇 만 원 몇 천만 원의 액수가 문제 아니라 받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너무 답답하다. 당신 말대로 "저 그렇게 안 산 사람입니다" 그랬으면 국민 앞에 적극적으로 결백을 증명해야지 왜 묵비권을 고수하냔 말이다.

 

그러면서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한명숙 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내 나이 스물 두어 살 때 일이다. 그분의 됨됨을 진작부터 알았던 나조차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데 하물며 국민들이야.

 

작고하신 강원용 목사님이 주도하신 '크리스챤 아카데미'라는 단체가 있었다. 새마을운동이 상징하듯 박정희정권이 산업화를 물밀듯이 몰아붙이던 시절이었다. 산업사회의 전진은 필연적으로 빈부의 격차, 도시와 농촌 그리고 자본가와 노동자 양극화를 극대화시켰다.

 

그 양극화를 좁히기 위해 강 목사님은 가교역할을 할 수 있는 '중간집단 육성'을 절감했고 그 집단의 모체가 바로 1974년에 창설된 '크리스챤 아카데미'였던 것이다.

 

1974년이었던가, 5년이었던가? 전자공장 노조 간부였던 내가 산업사회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 노동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자각을 깨치는 계기가 된 것은 크리스챤 아카데미 노동자 교육을 받고서였다.

 

그때 그 교육 중에 여성교육 간사이셨던 한명숙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얼굴만 알았다 뿐이지 노동교육과 여성교육은 별개였기 때문에 사사로이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오가면서 틈틈이 만났던 그분의 인상은 빼어난 미인에다가 기품이 넘쳐, 같은 여성 입장임에도 설렘이 일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교육은 농민, 노동자의 의식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교육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간 교육생들은 너나없이 현장에서 지도력을 발휘하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뭉쳐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는 깨우침은 아마도 유신정권에게 큰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마침내 유신정권은 칼을 뽑았다. '크리스챤 아카데미 사건'. 그 단체를 이끌었던 간사 모두를 체포한 것이다. 물론 죄목은 '반공법 위반' 의식화를 통해 노동자, 농민, 여성, 청년학생을 빨갱이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때의 해프닝이 떠오른다. 치졸한 검찰은 공소장에도 소설을 썼다. 뭐 빗대어 말하자면 '검사와 여선생' 영화류라고 할까? 빼어난 미인인 한 선생과 다른 분과 남자 간사 사이에 스캔들이 있지 않느냐는 요지였다. 말하자면 이 용공분자들이 사생활에서도 그지없이 지저분한 인간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한 수작이었던 것이다.

 

그 천박한 검찰이 그래도 2000년대에는 달라질 줄 알았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자마자 속속들이 드러나는 정황들이 가관이었다.

 

왜 한명숙 선생이 묵비권을 행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해명하면 해명할수록 더욱 지저분하게 수렁으로 처박는 검찰의 행태. 그 행태를 알고 있었기에 재판에서 사실관계를 밝히겠다는 결심을 하셨던 것은 아닐까.

 

하긴 이 사건 얼마 전에 무죄를 받았던 정연주 전 KBS사장 사건만 봐도 이명박 정권 하에 있는 검찰수준을 알고 남는 것을. 미련한 내가 그새 그 사건을 까먹고 한선생님을 의심했으니 할 말이 없다.

 

총리공관에 새로운 세트장까지 설치하고 돈 다발 두 개가 의자 위에 놓여있는 설정, 몇 십 초 사이에 서랍에 돈다발을 냉큼 집어넣을 수 있는지 없는지 재연모습이 얼마나 유치찬란한지도 모르고 티브이 화면을 도배한다.

 

70년대 말의 극본과 다른 게 있다면 남녀 스캔들 대신 고가의 골프채가 등장했다는 것 하나일까. 그것 말고 달라진 것이 없는 검찰집단에게 절망을 느낀다. 궁둥이에 욕창이 나도록 피터지게 공부해 연수원 성적이 200~300등 안에 들어야 판검사에 임명될 수 있는 엘리트 중에 엘리트가 판검사란다.

 

"무섭도록 집요하고 머리 좋은 엘리트들이여. 제발 상식이 통하는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해 주세요."

 

이 소박한 주문이 그토록 무리한 요구일까? 권력과 금력을 움켜 쥔 이 사회의 기득권층들이 일반 국민들의 의식을 얼마나 흐리게 하고 부패에 둔감하게 하는가 그 가공할 위력이 무서울 따름이다.

2010.03.23 15:25 ⓒ 2010 OhmyNews
#한명숙 전 총리 #뇌물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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