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하려거든 관직을 버리고 떠나라

[역사소설 민회빈강10]후계 구도가 확정되었다

등록 2010.03.28 12:44수정 2010.03.28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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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좌 임금의 자리 ⓒ 이정근


"어느 날 갑자기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경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임금의 성난 목소리가 빈청을 흔들었다. 열기 가득했던 장내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6월의 열풍에 땀은 비지처럼 흘렀으나 등골은 서늘했다. 입시했던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린 채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아무 말이 없었다.


따르려면 즉시 따르고, 따르지 않으려거든 관직을 버리고 떠나라

"대신의 의논이 모두 같아야 큰 계책을 결단할 수 있는데 매양 경상(經常) 두 글자만 되뇌고 있으니 한심하구나. 이런 큰일을 당하여 따르려면 즉시 따르고, 따르지 않으려거든 관직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임금과 신하들의 기 싸움이 정점을 향해 치달았다. 임금이 상도를 지키지 않으면 삼사(三司)의 간원들이 그 부당함을 상소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래도 임금이 시정하지 않으면 등청하지 않는다. 이 때, 임금이 한 발 물러나는 모양새를 취하며 상소를 받아들이고 입궐을 종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헌데, '날 따르지 않으려거든 떠나라'고 한 것이다. 신하들에 대한 선제공격이다. 대소신료들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격이다.

"백성들은 적자손(嫡子孫)이 당연히 왕위를 계승할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일 신들이 경솔하게 전하의 뜻을 따라버린다면 어찌 신하의 도리이겠습니까?"

판중추부사 이경여가 물러서지 않았다. 청나라 연호를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양에 끌려가 고초를 겪다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한 강골이다.


"세자가 이미 졸(卒)하였으면 뒤를 이을 사람은 마땅히 원손인데 국본(國本)을 바꾸는 일을 어찌 말 한 마디에 당장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영중추부사 심열이 가세했다. 경기관찰사와 한성판윤을 거친 심열은 호조, 형조, 공조판서를 거치면서 능력을 인정받아 우의정과 좌의정을 역임하고 영의정에 올랐던 인물이다. 일을 처리하는 추진력에서 김신국과 함께 으뜸과 버금을 다투는 신하중의 하나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은 역사에 남는다

"이미 원손의 명호가 바로잡아졌고 또 보양관(輔養官)도 세웠으니 위호(位號)가 정해진 지 오래입니다. 게다가 바꿀 수 없는 경상의 전법은 옛 역사에서 그 증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권도에 순종하는 신하들만 데리고 국사를 이끌어 가신다면 이는 견실한 국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상께서는 이미 바로잡힌 명호를 바꾸려고 하시는데 뭇 신하들이 모두 바람에 쏠리듯이 따라버린다면 장차 그런 신하들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우찬성 이덕형이 각을 세웠다. 이덕형과 인조는 특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인조반정 당시. 광해군의 도승지로 궁궐에서 숙직하던 이덕형은 반정군이 창덕궁을 점령하자 현장에서 주군을 바꾼 인물이다.

"이 일은 원로대신이 결단해야겠다. 경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임금의 시선이 김자점에게 멈췄다.

"원손문제는 전하의 깊고 원대한 생각에서 나온 것이니 속히 결정해야 할 일인데 어찌 우물쭈물하여 미룰 필요가 있겠습니까."
김자점이 좌우를 둘러보며 분위기를 잡았다. 이제 결론을 내야 할 때라고 판단한 것이다.

"경의 소견은 어떤가?"
임금이 영의정을 채근했다.

"계해년 반정(反正)과 정축출성은 상도를 벗어난 비상한 조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은 전하를 받들고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민들의 기대가 모두 원손에게 있는데도 전하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인조반정과 삼전도 항복을 몸소 결행했으니 따라가겠다는 뜻이다. 조정의 신하들은 물론 조선의 사대부들은 오랑캐라 멸시하던 홍타이지에게 임금이 삼전도에서 항복한 사실을 입에 담으려 하지 않았다. 정축년에 남한산성에서 나왔다 하여 정축출성(丁丑出城)이라 했다.

"원손이 있고 대군이 둘 있으나 장성한 사람이 어린 사람과는 다르기 때문에 봉림에게 뜻을 둔 것이다."

인조와 인렬왕후는 아들 넷을 낳았다. 왕비가 40넘어 막내를 낳다 산후병으로 승하했다. 모후를 죽음으로 몰아간 용성대군은 어려서 죽고 소현세자가 세상을 떠났으니 이제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남았다.

무너지는 척하고 승복하는 것도 신하의 기교다

"전하께서 종사를 위해 깊고 원대하게 계획하시는데 어찌 깊은 뜻이 없으시겠습니까."

"그렇다면 경의 뜻은 이 일을 불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인가?"

"성상께서 원손을 폐하고 대군을 세자 세우시는 것은 공심에서 나온 것이니 어찌 그 사이에 사적인 뜻이 있겠습니까."
영의정 김류가 무너졌다.

"신이 계달하는 것은 경상의 도리일 뿐, 권도를 쓰는 것은 전하께 달려 있습니다."

좌의정 홍서봉이 돌아섰다. 대사헌과 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홍서봉은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다. 병자호란 때는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로 활약했다.

"대신들의 뜻은 모두 일치되었는가?"

"이의가 없는 듯합니다."
영의정이 머리를 조아렸다.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노라."

드디어 대단원의 막이 내렸다. 곧은 도리를 따르는 것을 군자라 하고 소신을 버리고 무조건 순종하는 것을 비부(鄙夫)라 한다. 임금의 뜻을 미리 알아 비위를 맞추는 자를 백성들은 아첨배라 칭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덧붙이는 글 삼사(三司)-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병자호란 #소현세자 #민회빈 #봉림대군 #김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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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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