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스카우트 단복 사려면 화장실에 줄을 서시오?

화장실에서 치수재고, 1시간 40분 기다려 단복 구입하기까지

등록 2010.04.06 14:21수정 2010.04.06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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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4월 3일) 오후, 서울 안국역에 위치한 한국걸스카우트연맹 서울 북부지소를 방문했다. 둘째 아이가 올해 걸스카우트 활동을 하게 되어 단복을 구입하러 들른 참이었다. 3월 셋째 주쯤에 학교에서 가정통신문을 보내왔다. 안국역 1번 출구에서 예쁜 단복을 구입하라는 안내였다. 아이와 함께 안국역까지 왔다갔다 할 것이 번거롭게 여겨졌지만, 직장 다니는 바쁜 일상 중에 다른 방법을 알아볼 겨를도 없어 주말에 잠시 시간 내서 다녀오려니 했다.

 

걸스카우트연맹 건물 입구에 들어서자 '수품보급소 3층'이라는 표시가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니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줄을 지어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한 줄은 수품보급소로 보이는 사무실 쪽으로 서 있었고, 또 한 줄은 나와 아이가 내린 엘리베이터 바로 옆, 화장실 입구처럼 보이는 문을 향하고 있었다. 

 

단복 사러 와서 화장실 앞에 길게 줄 선 이유는

 

가까이 있는 학부모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줄인가요?"

"일단 번호표를 받고 저기(화장실)에서 치수를 잰 다음 사무실에서 단복을 구입해야 해요."

 

번호표를 받고 줄 끝에 아이와 함께 서서 기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영문을 몰랐다. 우연히 사람들이 많이 몰린 시간에 왔나보다 했다.

 

a 화장실 앞 늘어선 사람들 오른쪽 문은 화장실 입구. 사진은 치수를 재기위해 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서서 기다리는 모습.

화장실 앞 늘어선 사람들 오른쪽 문은 화장실 입구. 사진은 치수를 재기위해 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서서 기다리는 모습. ⓒ 김영숙

▲ 화장실 앞 늘어선 사람들 오른쪽 문은 화장실 입구. 사진은 치수를 재기위해 화장실 앞에서 길게 줄서서 기다리는 모습. ⓒ 김영숙

그런데, 치수를 잰다는 줄은 줄어들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큰 아이가 중학교 교복을 맞출 때도 간단하게 줄자로 몇 군데 재면 끝이었는데, 뭘 하느라 이렇게 오래 걸리는 걸까? 아이도 지루한지, 옆 계단을 오르락거리다가 화장실 안을 보게 됐나 보다.

 

"엄마, 옷을 다 입어보고 벗어보고 있어!"

 

설마? 하지만 정말 그랬다. 화장실 바닥엔 자리가 깔려 있었고 한 아이가 그 위에서 단복을 입어보고 있었다. 신발을 벗고 셔츠랑 바지, 스커트, 가디건까지 하나하나씩. 내게 번호표를 건네 주었던 관계자가 번호표 쪽지 뒷면에 아이가 입은 모양새를 확인하고 치수를 적어 주고 있었다.

 

화장실 칸막이 문은 모두 테이프로 봉해져 있었지만 오래된 건물이라 가까이 다가갈수록 퀴퀴한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엄마와 아이들은 냄새와 기다림으로 지친 표정이 역력했다.

 

이제껏 이렇게 해 왔는데... 뭐가 문제냐?

 

토요일이라 그런지 3층엔 수품보급소 외에 다른 사무실 문은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굳이 옷을 입고 벗으며 치수를 재야 한다면, 다른 사무실 공간을 잠시 이용하면 될 텐데라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내 뒷차례의 엄마가 치수를 확인하는 관계자에게 "왜 냄새 나는 이곳에서 치수를 재느냐? 다른 장소는 없냐?"라고 물었다.

 

"10년 동안 이렇게 해 왔어요."

 

뭐가 문제냐는 뉘앙스의 답변에 물어본 엄마가 오히려 할말을 잃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힘들다는 소리가 들리자 관계자가 한마디 더했다.

 

"얘들아, 걸스카우트 되는 게 쉬운 게 아냐."

 

일종의 통과의례처럼 잠시 지나가는 일로 여기라는 의미에서 던진 말일 것이다. 하지만, 가볍게 단복 사들고 건물을 나서거니 생각했던 엄마와 아이들에겐 농담으로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다.

 

a 수품보급소 사무실 여기저기 놓인 박스더미로 좁은 사무실에 학부모와 아이들이 엉켜 복잡하다.

수품보급소 사무실 여기저기 놓인 박스더미로 좁은 사무실에 학부모와 아이들이 엉켜 복잡하다. ⓒ 김영숙

▲ 수품보급소 사무실 여기저기 놓인 박스더미로 좁은 사무실에 학부모와 아이들이 엉켜 복잡하다. ⓒ 김영숙

거의 1시간을 기다려 치수를 재고 단복을 구입하러 수품보급소 사무실로 향했다. 사무실은 여기저기 물품 박스들이 쌓여 있어 줄서기에도 좁았다. 또 아이마다 구입품목이 10가지가 넘다보니 물건을 고르고, 구입 목록서에 일일이 체크를 하고, 금액을 전자계산기로 합산해서 확인하고, 카드 결제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구입한 항목은 단복의 필수 품목들이었는데 13가지 품목에 전체 금액은 12만4600원 이었다. 여기에 야영장비나 배낭등을 더하면 20만 원을 훌쩍 넘길 듯했다. 만만한 금액이 아니다. 가입비며 별도 야외활동비에도 신경이 곤두섰는데 비싼 금액으로 단복을 구입하면서 이런 곤란까지 겪으니 아무래도 곱게 마음을 먹기가 힘들었다. 건물을 나서기까지 거의 1시간 40여 분이 걸렸다.

 

인터넷으로도 구입 가능했던 단복, 그러나...

 

이렇게 밖에 단복을 구입할 수 없는지 궁금증이 더해졌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조회를 해보았더니, 걸스카우트 단복을 구입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있었다. 아니, 이렇게도 구입 가능한데, 왜 학교에서는 직접 가서 사라고 했을까?

 

월요일에 걸스카우트연맹 수품사무실에 전화로 문의해 보았다. 그러자 인터넷으로 구입도 가능하지만, 치수가 맞지 않는 경우 반품이 힘들다고 답변을 해주었다. 그러면 우리 아이 학교처럼 학부모에게 개별적으로 방문 구입하라고 안내하지 않고 단체로 주문하는 학교는 없는걸까?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학교 선생님이 일일이 학생의 치수를 재서 단체 주문하기가 사실상 번거로워 대부분의 학교에서 학부모에게 개별적으로 연맹을 방문, 구입토록 안내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토요일 오후의 상황을 얘기하자 연맹에서는 이렇게 해명했다. 수품사무실이 있는 3층에는 사무실의 빈 공간이 없어서 화장실을 탈의실로 이용하게 됐고, 다른 층에서 치수를 재려면 계단을 오르락 내리락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어 가까운 곳에서 빨리 처리해 주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도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최대한 고객의 편의를 생각한 처사였다고 했다.

 

얘기를 듣고 나니 토요일 오후의 그 황당함은 많이 누그러졌다. 그래도, 단복 치수를 재기위해 일일이 옷을 입어보는 방식의 후진성이나 마땅한 장소를 마련하지 못해 땜질식 처방으로 시작된 화장실 치수재기가 10년 넘게 지속된다는 사실은 쉽게 납득되지 않는다. 연맹이나 학교 모두 학생과 학부모를 위한 배려는 고려치 않고 있는 모습이 아쉽다.

 

걸스카우트 연맹에서는 단복 품목별로 신체 치수에 맞는 표준사이즈를 관리해서 까다로운 일부 구매자가 아니라면 간편하게 구매할 수 있게 하는 건 어떨까. 일선 학교에서도 몇 군데 되지 않는 수품보급소(서울의 경우 북부지소, 남부지소 2곳)를 학부모들이 직접 방문케 하는것보다 학생별로 치수를 취합해서 단체주문하는 형태로 전환하는게 훨씬 효율적일 것이다.

 

상대를 생각하는 배려의 마음과 창의적인 발상은 사소한 것에서 시작한다. 걸스카우트연맹은 그 정신을 되새기는 차원에서 학교에서는 함께하는 교육적 차원에서, 이런 것부터 개선하면 어떨까?

#걸스카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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