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

연극 속의 노년(23) :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등록 2010.04.17 15:44수정 2010.04.17 15:44
0
원고료로 응원

어느 어르신의 말씀이 기억났다. 친구의 부음을 듣고 달려가면 언젠가부터 아는 얼굴이라고는 영정 사진 속 친구 얼굴 밖에는 없어서, 친구의 빈소에 더 이상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 '떠난 친구가 남은 친구보다 훨씬 많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덧붙이셨다. 

 

소극장 무대에 차려진 빈소는 유난히 쓸쓸했다. 오래 전 아내와 헤어졌고, 자식들마저 엄마 따라 먼 나라에 가 살고 있으니 지켜줄 사람이 없다. 거기다가 세상과 등지고 숨어살다시피 했으니 더더욱 찾아올 사람이 없을 수밖에.

 

머리 하얀 친구 세 명이 지키고 앉아있다. 연극은 이렇게 전직 방송국 PD였던 윤수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방송 작가인 상일, 배우인 영호, 은행 지점장이었던 우만이 윤수의 빈소에서 만나 그들이 살아온 시간과 지금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낸다. 여기에 윤수의 아내였던 홍 여사가 등장해 이야기의 축을 네 개로 확대시킨다.    

 

a

연극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포스터 ⓒ 소극장 산울림

▲ 연극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포스터 ⓒ 소극장 산울림

친구 둘 혹은 셋이 어울려 지난 시절 이야기를 하니 끝이 없다. 젊어 한 때 잘 나갔던 시절 끝 간 데 모르고 올라가기만 할 것 같았던 자신감과 어느 틈엔가 내리막에 들어서서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떨어져 내리던 때의 막막함. 온몸으로 나이 든 삶을 살아내고 있는 '늙은 남자'들은 그 어디에도 기댈 곳 없어 외롭고 고달프다.  

 

친구들은 서로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사건들의 조각을 맞추기도 하고, 당시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일의 뒷이야기도 더 이상은 비밀이 아니어서 무덤덤하게 주고받는다. 젊어서의 치기나 객기가 하나도 부끄럽지 않은 것은 서로 오래된 친구 사이여서이기도 하지만, 더 이상은 가리고 숨길 것 없는 자기 노출의 시점에 이르러서인지도 모르겠다.

 

젊어 팔팔했던 시절을 떠올리다가도 금세 지금의 힘 없고, 일 없고, 돈 없는 처지에 한숨을 내쉬지만 딱히 길이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생활을 책임지고 유지하는 건 비록 극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전적으로 아내들의 몫이다. 누구는 보험 영업을 하고, 누구는 재테크를 한다. 낯설지 않은 이 시대 노년 부부의 풍경이다.

 

생각보다 빠른 은퇴와 길어진 수명으로 아무런 역할 없이 보내야 하는 노년기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한 자리에 모인 세 친구의 이야기가 모아지는 지점 또한 긴긴 인생의 남은 하루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에 대한 막막함이다. 

  

거기다가 한 친구는 혼자 지내며 스스로를 전혀 돌보지 않아 죽음에 이르렀으니, 이들의 마음이 오죽하랴. 그러니 술 마시고, 서로 오해하고, 언성을 높이면서 멱살을 잡을 듯 노려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그런다. 그러면서도 서로 위로하고 추억을 나누며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며 울고 웃는다. 그래도 이런 친구들 있음이 얼마나 다행인지.

 

셋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 속에, 혹은 다른 친구들이 자리를 잠시 비웠을 때 친구의 영정 앞에 홀로 앉아 털어놓는 독백 속에 지금 이 땅에서 '노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갖가지 어려움이 등장한다. 

 

돈, 건강, 사랑, 성, 할 일, 외로움, 인간관계는 물론이고 스스로를 붙잡고 괴롭히는 후회와 자책, 미련, 실수에 대한 기억까지 노년에 겪는 문제들이 아주 골고루 실감나게 다뤄지는 것을 보면서 역시 노년을 살아가고 있는 작가와 연출가의 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오래 살 줄은 몰랐다' '세월이 사람을 변하게 한다' 같은 어떻게 보면 평범한 대사가 단순한 문장으로 들리지 않고 가슴에 다가오는 것 역시 삶 속에서 자연스레 우러난 느낌을 전해주기 때문이 아닐까.

 

공연 시작 한참 전부터 극장 1층 찻집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 조용하게, 그러나 쉬지 않고 대화를 나누는 연출가와 작가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인사를 드리고 사진 촬영을 부탁하니 허허 웃으며 한 말씀하신다.

 

"우리 같이 늙은 사람 찍어서 뭐하게요?"

 

그러면서도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주신다. 두 분 웃으시는 모습 찍고 싶다고 하니, "허허, 거 참!" 하면서도 웃어주신다. 

 

a

연극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의 연출가와 작가 왼쪽이 연출가 임영웅 님, 오른쪽이 작가 윤대성 님 ⓒ 유경

▲ 연극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의 연출가와 작가 왼쪽이 연출가 임영웅 님, 오른쪽이 작가 윤대성 님 ⓒ 유경

노년이 담긴 영화나 연극, 책을 소개하고 있다고 잠깐 내 소개를 하니, 작가인 윤대성님이 한 말씀 하신다.

 

"이 연극 다 내 친구 얘기예요. 우리나 칠십 넘어도 이렇게 일을 하지, 다른 친구들은 그렇지 않거든, 그러니까 결국 다 우리 얘기라구..."

 

집에 와 검색을 해보니, 연출가 임영웅님은 우리 나이로 75세, 윤대성님은 72세였다. 바로 앞에서 뵈었을 때 그렇게까지는 안 보였는데, 이 또한 현역으로 일하는 분들이 누리는 즐거움이리라.

 

다시 연극 속으로 돌아가면, 시간이 흘러 친구는 한 줌 뼛가루가 되어 바다에 뿌려지고 그 자리에서 남은 세 친구는 인생을 다시 한 번 새롭게 해 줄 모종의 거사(?)를 벌이기로 결의한다. 함께 하기로 한 그 프로젝트 명은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해서 후회하고, 하지 않아서 후회하고, 하지 못해서 후회하는 게 인생이라서일까. '...했다면, ...있다면'이라는 말이야말로 우리들이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단어일지도 모른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관계를 되짚어보고, 새로운 날들을 계획해 보는 일은 우리가 죽음을 늘 기억하고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다만 죽음이 찾아왔을 때 경황 없이 할 일이 아니며, 허겁지겁하다 제대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갈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도 연극 속 세 친구는 먼저 떠난 친구의 빈 자리에서 이대로는 안 된다고, 무언가 시작해 봐야겠다고 결심하고 뜻을 모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많은 분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거나, 아니면 이런 저런 이유로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실천할 힘을 그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어 곧바로 좌절하고 말기 때문이다.

 

노년의 삶과 만남과 관계와 죽음을 노년이 쓰고, 만들고, 연기하니 생생하다. 이것이 노년의 힘이다. 앞으로 이들이 계속 모여 노년 연극 시리즈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꿈꿔 본다.

 

a

연극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공연을 기다리며 극장 앞에서... ⓒ 유경

▲ 연극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공연을 기다리며 극장 앞에서... ⓒ 유경

덧붙이는 글 |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윤대성 작, 임영웅 연출 / 출연 : 권성덕, 이인철, 이호성, 손봉숙) - 5. 2까지, 산울림 소극장, 02-334-5915 

2010.04.17 15:44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윤대성 작, 임영웅 연출 / 출연 : 권성덕, 이인철, 이호성, 손봉숙) - 5. 2까지, 산울림 소극장, 02-334-5915 
#한 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산울림 #노년 #노인 #죽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샌디에이고에 부는 'K-아줌마' 돌풍, 심상치 않네
  2. 2 황석영 작가 "윤 대통령, 차라리 빨리 하야해야"
  3. 3 경찰서에서 고3 아들에 보낸 우편물의 전말
  4. 4 '25만원 지원' 효과? 이 나라에서 이미 효과가 검증되었다
  5. 5 "윤 대통령, 류희림 해촉하고 영수회담 때 언론탄압 사과해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