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폰한 검사 상당수 성접대까지 받았다"

['검사 스폰서' 정씨의 증언-상] 20년 넘게 진행한 접대 내용 상세히 밝혀

등록 2010.04.21 17:14수정 2010.04.22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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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는 지난 4월 부산 현지에서 J씨를 세 차례 만났다. 그는 세 차례에 걸친 인터뷰에서 20여년 넘게 '검사 스폰서'로 활동해온 내용을 아주 자세하게 풀어놓았다. 부산·경남 지역을 거쳐간 상당수 검사들에게 술과 식사는 물론이고 돈과 성까지 접대해왔다는 그의 증언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오마이뉴스>는 그의 생생한 인터뷰를 정리해 두 차례에 나누어 싣는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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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설업체 대표가 수십명의 검사들에게 금품, 향응을 접대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파문이 커지고 있는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 설치된 조형물 '진실의 눈'에 비친 청사 전경. ⓒ 유성호



"검사 스폰은 8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6살의 젊은 나이에 아버지의 사업(N건설)을 물려받았다. 군대에서 제대한 직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N건설 대표이사가 된 것이다.

나는 별도로 N프라자를 설립하기도 했다. N프라자는 총 6층 건물로 지하 1층에는 룸살롱이 있었고, 1·2층에 커피숍과 사우나 등이 있었다. 그리고 3·4층에는 숙박시설이 있었는데 호텔만큼 좋았다. 원래 룸살롱은 1년 정도 직영하다가 임대해줬고, 모텔은 우리가 직접 경영했다. 접대를 위해 룸살롱이나 모텔을 경영한 것은 아니지만 이곳에서도 술과 성 접대가 이루어졌다.

아버지로부터 사업을 물려받을 때 나이가 어렸다. 그때 경남지역에 건설사가 30개 정도 있었지만 종합건설사는 없었다. 나머지 경쟁 건설사의 사장들은 대부분 아버지뻘 나이였다. 당시 우리 회사는 관급공사만 했는데, 서부경남에서 제일 컸다. 91년엔가 매출이 430억 원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4000억 원이 넘는 규모다. 지금은 진주세무서 사천지소로 바뀌었는데 당시에는 삼천포세무서가 있었다. 우리가 세금을 안 내면 세무서 운영이 안될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일일 명예세무서장을 하기도 했다.

나는 민자당 소속의 경남 도의원을 했다. 도의원이 된 이후에는 관급공사 계약을 내 이름으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건설업을 하던 동생에게 양도하고, 나는 N프라자만 운영했다. 당시 토지 등 기본 재산이 많았기 때문에 나는 정치쪽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동생이 아랫사람의 꾀임에 빠져 사고를 쳤다. 나는 당연히 회사를 동생에게 양도했으니까 당좌수표나 어음의 발행자도 바뀌었을 걸로 생각했다. 그런데 내 명의로 발행돼 형사처벌을 받은 적이 있다. 

"검사들이 으레 '스폰'을 요구하니까 안 해줄 수 없었다"

나는 85년께 법무부와 검찰에서 위촉하는 소년선도위원과 갱생보호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런 활동을 하려면 돈이 들기 때문에 지역유지를 위원으로 위촉한 것이다. 내가 제일 젊으니까 부회장이 되어서 제일 많이 활동했다. 그런 활동으로 인해 검찰청 출입이 잦았다.


보통 검찰의 사무과장이 검사들을 소개했다. 사무과장이 검사를 중개하면 내 명함을 주고 검사들과 이름을 텄다. 지청장은 나이가 많았지만 검사들 중에는 나와 비슷한 또래가 있어서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검사 스폰은 체육대회, 등반대회 등 행사비용을 대는 데서 출발했다.

갱생보호위원 등을 맡다 보니까 휴가 때든 행사 때든, 자기 손님이 놀러올 때 '스폰해 달라'고 전화가 온다. 검사들이 '한잔 하고 싶다'고 하면 함께 회식을 하고 2차를 갔다. 당시 성접대는 필수적이었다. 물론 끝까지 성접대를 거부한 검사도 일부 있었다. 극히 일부만 빼고 성접대를 안 받은 검사들은 거의 없었다.


남들은 '권력기관의 도움을 받기 위해 접대하는 것 아니냐'고 한다. 물론 100%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나는 어렸다. 20대가 건설업를 하는 경우는 당시 없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면서 맏아들로서 책임감도 있었다. 검찰에 '보험금'을 든다는 생각도 했고, 나로서는 '뒷배경'도 필요했다. 또 검사들이 으레 '스폰'을 요구하니까 안 해줄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지나친 지출이었다.

'촌지' 주는 일은 월례행사였다. 수표는 절대 안 주고 현금으로만 줬다. 그것도 반드시 신권으로 바꾸어서 줬다. 지청장에게는 1회 100만 원, 검사들에게는 1회 30만 원을 줬다. 한달에 두 번 줬으니까 지청장은 한달에 200만 원, 검사들은 60만 원을 받아간 셈이다. 검사들을 중개한 사무과장에게도 30만 원을 줬다.

검사실에 가면 계장들이 있는데 지금은 약해졌지만 당시 이들의 '끗발'이 셌다. 그들은 그 지역의 토착세력이었기 때문에 초임검사들은 이들의 눈치를 많이 봤다. 그들한테도 10만 원이나 20만 원을 줬다. 일반 여직원이나 전화교환원에게도 회식은 물론이고 돈도 줬다.

촌지를 주러 가기 전에 경리를 시켜 신권으로 바꾸어 놓았다. 경리가 신권을 가져오면 부속실의 비서실장 등이 100만 원짜리, 30만 원짜리, 10만 원짜리 '봉투'를 만들었다. 그리고 수행비서를 데리고 검찰로 갔다. 나중에는 BMW로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벤츠를 타고 검찰을 드나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검사실은 열악했다. 하지만 평검사라고 하더라도 방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많이 오픈(open)돼 있지만 당시에는 검사실이 폐쇄돼 있었다. 돈을 내놓으면 당연스럽게 받았다. 돈을 안 좋아하는 검사는 없었다. 돈을 주면 "또 주시나?" "오늘 회식하면 돈 써야 하는데 이렇게 돈을 주면 우짜나?" 등의 반응을 보였다. 회식할 때는 회식비 외에 교통비조로 20~30만 원을 건네곤 했다.

처음에 안 받으려고 하는 검사들도 있었다. 아마도 P대 로스쿨 교수로 가 있는 K검사, 법무부 고위간부인 H검사 등 두 세 명 정도가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그들도 나중에는 다 받았다. 진주에서 깐깐하기로 소문난 B검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말문을 트고 나서는 내가 운영하는 사우나를 제일 많이 이용했고 그뒤로는 촌지를 받았다.

"○○지검 부장검사 전원을 수 차례 접대한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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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의 한 건설업자가 작성한 '접대 일지' 여기에는 접대 일시와 장소, 수표번호, 신권번호 등이 꼼꼼하게 적혀 있다. ⓒ 오마이뉴스 구영식



2000년 이후 사업이 어려워지면서 옛날처럼 검사들에게 인사(접대)는 못했다. 그전에는 검사들에게 일률적으로 돈을 줬지만 이때부터는 친한 검사들에게만 줬다. 다만 검사들 회식 비용 대는 것만은 변함없이 했다. P검사장이나 H검사장이 부산지검에 있을 때 검사수가 60여 명 정도 됐다. 그 가운데 상당수가 내 접대를 받았다. 내가 분기별 회식, 환영식, 환송식 등을 도맡아 치러줬다.  

2000년엔가 K검사가 부장으로 승진해서 ○○지청으로 왔다. K검사 환영식한다고 ○○지청의 평검사들이 전부 다 회식에 참석했다. ○○에서 부산으로 넘어와 부산의 광안리의 S횟집에서 1차를 한 것이다. K검사가 발렌타인 21년산 양주를 가져와서 그걸로 폭탄주를 만들어 마셨다.

2차는 H콘도 지하의 대형룸살롱인 'M'에 갔다. 그런데 K검사가 나더러 "J회장, 오늘은 술값 계산은 하지 마이소"라고 했다. 내가 "왜요?"라고 묻자 그는 "스폰서가 있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그 '스폰서'가 그 술집 사장이었다. 그러니까 검사들이 술집 사장에게 술 접대를 받은 것이다. 그래도 1인당 30만 원씩 하는 '2차비'는 다 내가 냈다. K검사는 빼고 2차에 참석했던 대부분의 검사들이 성접대를 받았다. K검사는 내가 준 돈으로 평검사들에게 교통비조로 10만 원씩 줬다.

P 지검장이 울산지검 부장검사를 할 때다. 내가 차 한 대를 보내서 부산으로 모셔왔다. 2차로 부산 온천장 근처에 C룸나이트클럽(접대부가 나오는 나이트클럽)에 갔다. 거기서 양폭(양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을 마셨다. 나와 P지검장은 빼고 다른 검사들은 다 '2차'를 나갔다. 물론 술값과 2차비는 전부 내가 냈다.

2003년엔가 있었던 일이다. 당시 강금실 변호사가 법무부 장관으로 부임한 이후 부산지검·고검 사무감사가 진행됐다. 노무현 정부와 검사가 척지면서 서슬이 퍼럴 때였다. 대검 감사팀들이 사무감사를 마칠 때쯤 회식자리가 마련됐다. 부산지검쪽에서 '잘 평가해 달라'며 마련한 감사팀 접대였다.

1차는 횟집에서 했는데 회식비용은 전부 내가 냈다. 당시 부장검사들이 전부 참석했다. 1차에서 끝냈어야 하는데, 폭탄주가 6~7잔 돌아가면서 '2차' 가자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2차로 부산 온천장 근처 룸살롱 'M'에 가서 유흥을 즐겼다. 이때는 성접대가 없었다. 당시 감사팀으로 내려온 검사 중 한 명이 현재 A지청장이다.

접대는 내가 알아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검사쪽에서 요구했다. "회식 한번 시켜 달라" "누구 부장 떠나는데 환송식 한번 열어 달라" 등등…. 이 지역에서 날고 기는 사람들 많겠지만 ○○지검 소속 부장검사 전원을 한 두 번이 아닌 수차례 접대한 사람은 나밖에 없다. 장기적으로 오랫동안 친해왔고, 신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런 식으로 나랑 관계를 맺은 검사들이 이쪽에 부임하면 자연스럽게 연락을 한다. 또 검사들이 다른 지역으로 떠나면 이쪽으로 부임하는 검사에게 스폰서를 소개해준다. 일종의 '스폰서 인계'다. 

"지역에 문제가 생기면 검찰에 청탁해 해결했다"   

검찰에 청탁도 많이 했다. 내 건은 하나도 없고, 지역에 문제가 생기면 검찰에 청탁했다. 그 가운데 두 가지 정도가 기억에 남는다.

현 P검사장이 검사로 있을 때 술집 단속을 나갔다. 대낮에 수사관을 데리고 술집을 쳐들어갔는데 술집 지배인이 "니가 무슨 검사야?" 하면서 검사 신분증을 하수구에 빠뜨렸다. 그 지배인은 학교 후배이기도 하고, 아버지 때부터 우리 차 운전을 하던 기사의 친동생이었다. 화가 난 검사가 술집 지배인을 유치장에 처넣었다.

그런데 사천읍지서의 P지서장이 검찰 지휘도 받지 않고 풀어줬다. 지서장이 구속될 수 있는 사건이어서 지역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래서 내가 저녁에 ○○지청장을 만났다. 결국 징계는 하지 않고 P지서장을 한단계 낮은 ○○지서로 보내는 걸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또 하나는 경남 상주해수욕장에서 제 학교 후배들인 지역깡패들이 전라도쪽 깡패들과 패싸움이 붙은 적이 있다. 당시 신문에도 크게 났다. 내가 검찰에 부탁해 공소장을 변경했다. 법조항의 2조 2항과 3항의 처벌 수위가 달랐는데 처음엔 검찰이 센 걸로 기소했는데 내가 처벌 수위가 낮은 쪽으로 공소장을 변경해 풀려났다."
#J리스트 #검사스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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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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