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59)

[우리 말에 마음쓰기 905] '왕과 같은 존재',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듬기

등록 2010.04.25 10:38수정 2010.04.25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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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왕과 같은 존재

 

.. 시타델산은 다른 산과 비교가 되지 않는, 왕과 같은 존재였다 ..  <제임스 램지 울만/김민석 옮김-시타델의 소년>(양철북,2009) 74쪽

 

"비교(比較)가 되지 않는"은 "견줄 수 없는"이나 "댈 수 없는"으로 다듬습니다. "한 자리에 놓을 수 없는"이나 "나란히 놓을 수 없는"으로 다듬어도 어울리고, "사뭇 다른"이나 "-보다 훨씬 거룩한"이나 "-보다 몹시 우람한"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왕(王)'은 그대로 두어도 되지만 '임금'이라는 토박이말이 있습니다.

 

 ┌ 왕과 같은 존재였다

 │

 │→ 임금과 같은 산이었다

 │→ 임금과 같은 봉우리였다

 │→ 임금과 같은 곳이었다

 │→ 임금님과 같았다

 │→ 임금님과 다를 바 없었다

 └ …

 

산이면 다 같은 산이지, 더 높거나 거칠거나 오르기 힘들다고 해서 한결 우뚝 솟았다든지 임금과 같은 산이라든지 일컬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산은 스스로 내가 임금이요 네가 임금이라는 금긋기를 하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낮은 산도 산이요 높은 산도 산이며, 낮거나 높거나를 떠나 뭇 목숨을 고이 껴안으며 보듬는 너른 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람들은 산높이를 잽니다. 무슨무슨 산이 가장 높다고 차례를 매기고, 높거나 거친 산 꼭대기까지 하나둘 밟아야 비로소 대단한 일을 한 듯 여깁니다. 높은 산 꼭대기에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갈 마음이 아니면서 그예 오르고 다시 오릅니다. 삶을 꾸리는 곳이 아니라 올랐다가 내려와야 하는 곳으로 산을 바라봅니다. 이렇기 때문에 산에 굴을 내고 한켠을 깎아 길을 닦으며 아파트까지 때려지을 테지요. 산을 산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니 산을 산 그대로 아낄 줄 모르고, 산을 산 그대로 아낄 줄 모르는 우리들 매무새인 탓에 사람을 사람 그대로 마주하며 아낄 줄 모릅니다. 이리하여 우리들 서로서로 나누는 말마디를 말마디 그대로 헤아리면서 아낄 줄 모릅니다.

 

자연을 아낄 줄 모르며 사람을 아낄 줄 모르고, 사람을 아낄 줄 모르면서 삶을 아낄 줄 모르다가는, 삶을 아낄 줄 모르는 이음고리는 말을 아낄 줄 모르는 데로 이어집니다.

 

 ┌ 가장 우뚝 솟은 산이었다

 ├ 가장 거룩한 산이었다

 ├ 더없이 우뚝 솟은 곳이었다

 ├ 더없이 거룩한 곳이었다

 └ …

 

보기글을 생각해 봅니다. "시타델 산은 다른 산과 견줄 수 없는 임금님 같은 곳이었다"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시타델 산은 다른 산들과 견주어 더없이 거룩한 곳이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자말 '존재'를 빌어 가리키는 셈이고, 이렇게 풀어 적는 말마디로 시타델이라고 하는 산이 얼마나 거룩한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합니다. 이 보기글은 영어를 우리 말로 옮겼는데, 한글로 적힌 "왕과 같은 존재였다"를 영어로 옮기거나 "임금과 같았다"나 "임금과 같은 산이었다"를 영어로 옮긴다면 어떻게 될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을 영어로 옮길 때하고 '인간'을 영어로 옮길 때는 어떻게 될는지 궁금합니다. '하나'와 '일'은 달리 옮길는지요? '일'과 '노동'과 '근로'는 어떻게 옮길는지요? '책'과 '서적'은 어떻게 옮길까요? '사다'와 '구입하다-구매하다'는 다르게 옮길까요? '책읽기'와 '독서'는 어떻게 옮기려는지요?

 

오늘 우리가 쓰는 말을 곰곰이 돌아본다면, 우리는 껍데기는 한글이지만 속알맹이로는 참다운 우리 말을 한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겉으로야 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이라지만, 속으로는 거짓스러운 우리 말이거나 뚱딴지 같은 우리 글이라 할 만하다고 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빛을 뽐내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우리 글빛을 살리지 못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겉모습으로는 한국사람이라 하여도 속삶으로는 한국사람이 아니며, 이제는 우리 겉모습조차 뜯어고쳐서 한국사람 아닌 서양사람이나 미국사람으로 바꾸고 있는 가운데 우리들 주고받는 말과 글 또한 우리 말글이 아닌 어설프고 엉뚱한 말글로 팔아치우고 있습니다.

 

 

ㄴ.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라크에는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라크전쟁을 지지했다가, 나중에 와서 ..  <강상중/이목 옮김-청춘을 읽는다>(돌베개,2009) 5쪽

 

"그러나 결과적(結果的)으로"는 겹말입니다. '그러나'로 손질하거나 '그러나 끝끝내'로 손질해 줍니다. '대량살상(大量殺傷)무기'는 그대로 두어도 될 테지만 '사람을 한꺼번에 죽이는 무기'나 '사람을 어마어마하게 죽이는 무기'로 풀어서 적어도 됩니다. '주장(主張)하면서'는 '외치면서'나 '말하면서'나 '앞세우면서'로 다듬고, '지지(支持)했다가'는 '밀었다가'나 '옳다고 여겼다가'로 다듬습니다.

 

 ┌ 무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

 │→ 무기가 있지 않았다

 │→ 무기가 나오지 않았다

 │→ 무기를 찾을 수 없었다

 │→ 무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 …

 

두 줄로 된 보기글을 살펴보면, 첫 줄에는 '존재하지'라 적고 다음 줄에는 따옴표까지 붙이며 '있다'라 적습니다. 얼핏 넘기면 알아채지 못하는데, 곰곰이 살피면 '존재하다 = 있다'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글쓴이나 옮긴이나 같은 뜻과 쓰임인 두 낱말임을 헤아리지 않았음을 짚을 수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적바림하지 않은 글입니다. 쉽고 수수하고 알맞게 적어 내려가지 않은 글입니다. 티없이 맑게 적지 않은 글입니다. 꾸미며 쓴 글이요, 겉치레가 담긴 글이며, 말재주를 피운 글입니다.

 

사람이 있거나 없듯 무기가 있거나 없는데, 우리가 바라보는 그대로 '있다-없다'를 넣지 못합니다. 생각이 있거나 없듯 말이 있거나 없는데, 우리가 느끼는 그대로 '있다-없다'를 밝히지 못합니다. 어쩌면, 알맞춤하게 쓰지 못한 글이라기보다는 언제나 이렇게 틀에 맞추어진 글이 아닐까 싶습니다. 흐름을 살피고 느낌을 북돋우는 글을 쓰지 못하고, 지식조각만 담거나 내 목소리 높이기에 얽매인 글을 쓰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 어떠한 무기도 없었다

 ├ 어떠한 무기도 만들고 있지 않았다

 └ …

 

바르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기 힘든 까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바르게 말을 하지 못하기 앞서 바르게 생각하지 못하는 탓에 오늘 우리 모습은 이 모양이겠다고 느낍니다. 바르게 살지 못하고 있으니 바르게 생각하는 힘을 잃거나 잊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 스스로 바른 삶과 바른 생각을 내동댕이치면서, 저절로 바른 말과 바른 글을 내다 버리는 셈이지 싶습니다.

 

바른 밥을 먹고 바른 일을 하면서 나 스스로 바른 사람이 되어 동무를 사귀고 이웃하고 어울린다면 시나브로 바른 넋과 바른 얼입니다. 바른 넋과 얼이니 아주 마땅하게 바른 마음과 사랑일 터이고, 바른 마음과 사랑을 바탕으로 바른 말과 글을 풀어내겠지요.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4.25 10:38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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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존재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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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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