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회색 아스팔트 싱글이라는 지붕 마감제를 썼다.
송성영
시골생활을 시작한 지 3년쯤 지날 무렵에도 그랬습니다. 아이들 옷가지가 흙범벅이 되곤 했던 질퍽거리는 마당에 산에서 쫄쫄거리며 흘러 들어와 세탁기를 돌리기 힘든 식수. 장마철 똥물 튀기는 재래식 화장실에 시도 때도 없이 쥐새끼들이 부엌을 휘젓고 다녔지만 태연했습니다. 10년 가까이 한 달에 60만 원의 생활비로도 끄떡 없이 잘 살았습니다. 근심걱정 접어두고 살고자 했던 내가 오히려 걱정할 만큼 태평하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시골생활 10년째로 접어들면서부터 갱년기 증세가 찾아 왔고, 불편한 시골집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소박한 삶을 지상과제처럼 여겼던 나를 무능력한 남편 취급할 정도로 날이 서 있었습니다. 그렇게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소박하게 살아왔던 시골생활을 지긋지긋하게 여겼던 아내였는데 모양새 갖춰 가는 집에 홀딱 반해 예전처럼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겠노라 '대책없는' 마음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본래 우리는 대책 없는 부부였습니다. 번듯한 목조 주택을 지으리라고는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못했습니다. 터를 구하기 전까지 보금자리를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도 없었습니다.
나는 목수들로부터 '집주(집주인이라는 뜻)'라 불리우고 있었지만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설계도면을 그린 아내가 선택한 돌 회색의 '아스팔트 싱글'이라는 것이 한창 지붕을 장식하고 있었지만 '저게 아스팔트 싱글이라는 것이로구나' 남의 집 구경하듯 멍하니 올려다 보고만 있었습니다.
윤구씨가 그때그때 필요한 건축 자재 주문서를 내밀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냉큼 건축자재상에게 돈을 송금해 주고 주문서에 빠져 있는 소품들을 구입하기 위해 철물점을 들락거리며 잔심부름꾼 노릇을 하면서 커피나 목재를 나르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렇다고 넉넉한 건축자금으로 여유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3000만 원으로 30평짜리, 그것도 다락방을 두 개씩이나 올리는 목조주택을 짓겠다는 자체가 무모한 짓이었습니다(다락방을 지어주겠다고 제안한 것은 윤구씨였다). 처가에서 목재며 창호를 내주고, 목수들의 팀장인 윤구씨가 인건비를 낮게 책정해 공사를 시작했다고 하지만 손에 쥐고 있어야 할 자금은 최소 5000만 원 이상이 필요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00만 원으로 대책 없이 집짓기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윤구씨 말대로 '집을 짓다보면 다 짓게 되어 있다'는 그 대책 없는 믿음이 맞아 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기초공사를 시작하면서 이제 비로소 집을 짓는구나 실감하고 있을 때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로부터 2000만 원이라는 돈이 통장에 찍혀 들어왔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돈 다발이 뚝 떨어진 것처럼 말입니다.
대책 없이 집 짓는 과정에 나타난 귀한 손길들사실 집 짓기 전에 이것저것 따졌다면 여태 시작도 못했을 것입니다. 애초에 계획하지 않았던 집짓기였듯이 집 짓는 과정 역시 꼼꼼하게 계획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윤구씨 역시 공사 일정에 맞춰 그때그때 필요한 일손들을 불러 들였고 그때그때 필요한 건축 자재들을 구입해서 썼습니다.
경험 많은 윤구씨 나름대로의 계획된 진행이었겠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전혀 계획서에 없던 일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무계획적인 우리 부부와는 상관없이 집은 하루가 다르게 성냥개비 쌓듯 척척 완성되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대책 없이 집을 지어가는 과정에서 귀한 손길들이 곳곳에서 나타났습니다. 그것도 전혀 계획에 없던 뜻하지 않은 도움의 손길들이었습니다. 전기공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애초에 전기설비업자를 따로 정해 놓지 않았는데 생면부지의 전기설비 업자를 만났던 것입니다.
본래 공주에서 건설현장 소장 일을 하던 외사촌 동생이 잘 아는 전기설비업자를 보내 주겠다고 했습니다.
"전기설비하려면 보통 평당 9만 원 정도 하는데 7만 원 정도로 해주겠데요.""거리가 멀어서...""출장 가는 것이 문제긴 하지만, 잘 아는 사람이니까 믿고 맡겨도 돼요.""출장비도 줘야겠지.""형 집 짓는 데 도움도 못 주고 있는데 그런 거 걱정 마세요. 출장비는 내가 알아서 할게요."나는 가능하면 어떤 일이든 비용이 조금 더 든다 해도 고흥 사람들과 함께 일하고 싶었습니다. 집을 짓고 나면 평생을 함께 할 사람들이니까요.
외사촌 동생은 공사 진행 상태에 따라 전기설비업자를 보내주겠노라 했지만 건설현장 소장이라는 안면 때문에 고흥까지 내려와서 싼 공사비로 일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 무렵 집 짓는 공사 현장을 구경하러 온 근처 암자에 사는 스님에게 사정 얘기를 했더니 잘 아는 전기설비업자를 소개해 주겠다며 즉석에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평당 10만 원 정도 한다는데 오라고 할까요?""그 정도 한다고들 하는데, 9만 원에 할 수 없을까요?.""그것도 아주 싸게 하는 거라 안하요."찜찜해 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전화 한통이 걸려 왔습니다. 집 터 다지는 일을 도왔던 굴착기 기사 아저씨였습니다.
"저번에 얘기했던 전기 공사는 어떻게 하기로 했소?""그렇찮아도 고민 중인데 잘 아시는 분이 있남유?""좋은 사람이 있는디요.""아 그래요? 평당 얼마 정도 한답니까?""잠깐만 기다려 보시요이. 내가 잘 얘기해 볼테니께."굴착기 기사 아저씨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고 전기 설비를 평당 7만 원에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굴착기 작업을 할 때 윤구씨와 신경전을 벌어가며 자기 방식대로 고집스럽게 일했던 기사 아저씨. 그럼에도 집주인 나는 싫은 소리 한마디 하지 않고 몇 만원의 웃돈까지 얹어주었는데 그것이 공사비 저렴하고 사람 좋은 전기설비업자 소개로 되돌아 왔던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