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미제라블의 죽음에 부치는 노래

<금양 98호> 사망·실종 선원 9인을 기리며

등록 2010.05.01 13:38수정 2010.05.07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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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의 함수 인양이 한창이던 지난 4월 23일 오후, TV 화면 하단으로 흐르던 뉴스 기사 중 하나가 눈길을 붙잡았다. <금양호, 수중 수색작업 중단>. 온 국민이 천안함의 함수가 물 위로 떠오르는 모습을 보면서 폭발 순간의 비극을 떠올리며 안타까워하던 그 시각, 금양 98호 실종선원 가족들은 실낱같은 희망마저 끊어지는 고통의 시간을 맞고 있었다. 수심 80미터의 심해에 가라앉은 금양 98호는 그물과 로프에 칭칭 감겨 있어 사실상 선실 수색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한다. 총 9명의 선원 중 2명의 시신만 수습된 금양98호 실종선원들은, 천안함 실종 장병 6명과 함께 지금도 차갑고 깊은 바다 어딘가에서 울부짖는 뭍의 통곡을 듣고 있을 것이다.

 

주꾸미 철을 맞아 충남 앞바다에서 조업 중이던 금양98호 선원들이 천안함의 실종자 및 유류품 수색에 나선 것은 천안함 침몰 6일만인 4월 2일이었다. 하루 조업을 포기하면 1000만원 상당의 손실이 발생하지만, 이런 손실이 발생함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실종자 및 유류품 수색을 위해 기꺼이 서해 바다로 배를 돌렸던 것이다. 수색 중 그물이 심하게 찢어지면서 작업을 마치고 귀환하던 배는 어둠이 깔린 대청도 앞바다에서 캄보디아 국적 화물선과 충돌 후 침몰했다. 다음 날, 시신이 발견된 사람은 두 명이었다. 한 사람은 55세의 김종평씨였고, 또 한 사람은 인도네시아에서 온 36세의 남방 누르카효씨였다.

 

두 사람의 죽음은 가는 길도 외롭고 쓸쓸했다. 김종평씨는 어릴 때 부모를 잃고, 키워주던 할머니도 여읜 후 배움도 없이 홀로 자랐다. 젊은 시절 결혼도 했었지만, 실패한 이후엔 아무 연고 없이 뱃일을 하며 살아왔다. 그러다가 지난 2004년, 항구에서 노점상을 하던 여인을 만나 정을 나누면서, 뱃일이 없을 때면 컨테이너 박스에서 그녀와 함께 지냈다. 그녀의 이름은 이삼임.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부표처럼 떠다니던 종평씨에게 삼임씨는 집과 같은 존재였고, 삼임씨에게도 종평씨는 든든한 동반자였다. 그러나 이젠 모두 흘려 보내야 할 추억이 됐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이제는 뭍에서 편하게 살고 싶다던 종평씨의 소박한 바람은 푸른 봄 바다 위의 하얀 포말이 됐다.

 

그의 장례식은 지난 4월 22일, 그를 애타게 기다리던 가엾은 여인과 실종 선원 가족 10여 명이 모여 조촐하게 치러졌다. 혼인신고도, 결혼식도 하지 않은 채 6년을 함께 지내온 삼임씨에게 남은 것은 종평씨가 끼워준 금반지 하나였다. 가족도, 친척도 없는 종평씨의 시신을 무연고자 처리하려는 정부에 맞서, 마지막 가는 길까지 배웅해낸 삼임씨는 분명 종평씨의 아내이자 가족이다. 그녀의 눈물과 금가락지 낀 굵은 마디의 손가락을 보면서 그 곁에서 술 한 잔, 곡 한 자락 올리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무관심이 참으로 아쉽고 부끄러웠다. 가난했지만 외롭지 않았던 그들의 이별 장면은 내게 루시드 폴의 <레미제라블>의 한 소절을 떠올리게 했다.

 

시간이 흘러가도 / 기억 속의 그대 얼굴 지워지지 않아

눈이 보지 못해도 / 귀가 듣지 못해도

차가운 여기 이 자리에 / 그대 있음을 알고 있죠

아직 날 울리는 사람 / 어떻게 그댈 잊어요

 

김종평씨와 함께 발견된 인도네시아인 누르카효씨의 경우는 더욱 사정이 딱하다. 고향에서 트럭을 운전하던 누르카효씨는 둘째가 태어나자 돈을 벌기 위해 2년 전 한국에 왔다. 그러나 취업 브로커에게 지불한 돈을 갚기 위해서는 꼬박 2년간 일해야 했다. 월급 90만원 중 70만원을 본국으로 부치며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가족과 상봉할 날을 기다리며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던 그는 김종평씨와 함께 싸늘한 주검으로 바다 위에 떠올랐다. 가난한 그의 가족은 죽음 앞에서도 비행기를 타지 못했고, 시신 확인은 대구 공장에 다니는 처남이 대신했다.

 

누르카효씨는 금양98호 희생 선원 중 유일하게 두 아이를 둔 평범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의 시신은 4월 9일, 비행기 화물칸에 실려 본국으로 돌아갔다. 인도네시아의 공항에서 가장의 관을 마주했을 가족들의 통곡과 슬픔은 어떤 죽음 못지않은 비탄으로 가득 찬 아픈 풍경이었을 것이다. 599일 간 한국에서 꾸었던 서른여섯 살 람방 누르카효의 코리안 드림은 빈 손으로 끝이 났고, 그의 가족에게 이 봄은 처참한 현실과의 맞닥뜨림이 됐다.

 

김종평씨와 누르카효씨를 포함한 금양98호 사망 실종 선원들은 우리 사회에서 크게 주목받는 이들은 아니다. 대부분 가족이 없거나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살아온 사람들이었다. 실종자 가족들 역시 택시 운전을 하거나, 옷 장사를 하거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다.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에서,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이다. 먹고 사는 일만으로도 하루가 짧고, 고단한 이들이지만, 천안함 장병들의 소식을 접하고 망설임 없이 생업을 포기한 채 백령도 앞바다로 향한 9명의 선원들. 그것이 그들 생의 마지막 뱃길이 됐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우리 사회의 애도는 너무 가볍고, 일상적이다. 지난 시절, 식민과 독재 하에서 숱한 탄압과 핍박에 저항하며 가장 분노하고, 거리로 나간 것은 권력층도, 지식인들도 아니었다. 바람보다 풀보다 먼저 일어나 시대에 저항하고, 폭력 앞에 스러져 가면서도 자신의 희생을 아까워하지 않던 이들은 이름도 명예도 없던 서민들이었다. 그들과 함께 어깨를 걸었던 학생, 지식인들은 자신들이 마주한 생생한 역사의 현장들을 시로, 노래로 기록했다. 시는 노래가 되고, 노래는 구호가 됐다. 50년 전, 4.19를 추모한 시조시인 이영도의 <진달래>가 그 대표적인 예다.

 

눈이 부시네 저기 /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 간 / 젊은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 여울여울 붉었네

 

이영도의 시에서 진달래는 핏빛 죽음을 애도하는 비탄의 꽃으로 표현됐고, 30여년 후 1987년 6월 항쟁의 현장에서 노래로 되살아났다. 어디 그뿐인가. 1980년 광주의 봄 역시 노래로 산화됐다.

 

봄볕 내리는 날 / 뜨거운 바람 부는 날

붉은 꽃잎 져 흩어지고 / 꽃향기 머무는 날

묘비 없는 죽음에 / 커다란 이름 드리오

여기 죽지 않은 목숨에 이 노래 드리오

 

시대가 암울할수록, 궁핍할수록 노래는 가난한 이들의 삶과 애환 속을 파고들며 시름을 함께 해 왔다. 지금은 철거된 청계천 고가도로 밑, 낡은 리어카와 허름한 포장마차들, 곳곳에 균열이 생겨 무너질 듯한 시민아파트.. 서울 시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혹은 줄기차게 지나다녔을 그 거리의 풍경은 분명 지금의 서울이 추구하는 디자인 수도, 창의도시 서울과는 정반대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청춘을, 가난을, 소외를 등에 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같은 하늘 밑에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었다. 가진 것은 없지만, 자신보다 더 부족한 이를 위해 나눌 줄 아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던 골목, 그곳에는 남루하지만 불쌍하지 않은 가슴 따뜻한 이야기와 추억이 꿈틀거렸다.

 

청계천은 1980, 90년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청춘의 감전을 안겨준 곳이기도 하다. 허름한 헌 책방, LP판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팔던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는 주머니가 가난한 문학청년들에겐 봄날 같은 장소였다. 그 거리는 노점상 철거반들이 수시로 들이닥치던 곳이었다. 당시 철거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 시위대는 구호는 높았으나 대열은 약했다. 진압경찰의 최루탄과 곤봉 세례에서 결코 의연할 수 없는 어린 나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나선 것은 허름한 거리의 노점 상인들이었다.

 

집회나 시위와 같은 고급한 표현과 자리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그들은 자식 같은 학생들을 대열 안으로 밀어 넣으며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을 양쪽을 에워싸며 명동 성당까지 행진하던 그들의 모습은 그 거리에 나섰던 누군가에겐 여전히 '고마움'으로 기억될 것이다. 또한 자신들을 위해 학교 밖으로 나와 깃발을 든 아직은 젊은 학생들이 고맙기는 상인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리라. 마음이란 서로 합쳐지고, 섞이면서 깊어지는 강물 같은 것이 아닐까. 청계천 상인들의 삶터를 기억하며, 그날의 풍경 속에 담긴 그들을 떠올려본다.

 

파란불도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 / 물 샐 틈 없는 인파로 가득 찬

땀 냄새 가득한 거리여 어느새 정든 추억의 거리여

어느 핏발 솟은 리어카 꾼의 험상궂은 욕설도 / 어느 맹인 부부가수의 노래도

희미한 백열등 밑으로 어느새 물든 노을의 거리여

뿌연 헤드라이트 불빛에 / 덮쳐오는 가난의 풍경

술렁이던 한낮의 뜨겁던 흔적도 / 어느새 텅 빈 거리여

칠흙 같은 밤 쓸쓸한 청계천 8가 / 산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비참한 우리 가난한 사랑을 위하여 / 끈질긴 우리의 삶을 위하여

 

산다는 것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돈도 권력도 명예도 목숨 앞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 소중하고 귀한 생명을 이름도 모르는 젊은이들을 위해 바다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그들의 죽음을, 그들의 희생을 값지게 노래하지 않는다. 그저 동정하고, 측은해 할 뿐. 우리네 인심이 어디 그러한가. 세상을 등진 사람을 위해 술 한 잔 붓고, 곡을 함께 해주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일진대 어찌 된 영문인지 <금양 98호> 희생 선원의 죽음에 대한 예우는 TV에서도 신문에도 보기가 힘들다. 실종자 가족들의 분노와 한탄 소리만 난무할 뿐이다.

 

2010년의 봄은 50년 전, 30년 전, 그리고 바로 1년 전의 풍경처럼 비탄에 잠긴 이들의 설움과 분노로 또다시 깊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낙화가 분분한 봄날의 풍경은 누군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가 되리라. 그들의 슬픔의 무게나 값을 따지고 매기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함께 나누고 손을 잡아 주는 것이 그들의 슬픔을 덜어주고 아픔을 견디게 해주는 힘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천안함 희생 장병 가족들과 금양98호 선원 가족들에게 깊은 애도를 보내며, 시대의 질곡마다 노래로 어둠을 밝혔던 정태춘, 박은옥의 노래를 서해 바다 위로 띄어 보낸다. 더 이상 아픈 봄이 오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봄밤에 쓴 편지 / 못 부칠 편지

그 편지 쓰다가 가슴이 타서 / 고운 님 미운 님 잊어버릴까

봄밤에 부른 노래 님 그린 노래

그 노래 부르다 목이 메어서 / 고운 님 미운 님 잊어버릴까

봄밤에 꾸는 꿈 아지랑이 꿈

그 꿈을 꾸다가 눈물이 나서 / 고운 님 미운 님 잊어버릴까.

2010.05.01 13:38 ⓒ 2010 OhmyNews
#천안함 #금양98호 #98금양호 #레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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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비평가. 문화콘텐츠학 박사. 디지털과 인문학의 가로지르기를 통해 강의와 연구, 비평을 통해 세상과 소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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