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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교육'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당연히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 피어오른다. 내 선친은 조실부모하고 소년 시절을 어렵게 사신 분이다.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홉 살 때는 어머니마저 잃었으니, 선친의 소년 시절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아프다.
당시 겨우 열아홉 살이던 장형(長兄)에게 의지하여 살다가 수재 소리를 들으면서도 초등학교 3년 중퇴로 학업을 마쳐야 했던 그 속내들을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눈물을 머금어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조실부모하신 선친께서 어떻게 밥상머리교육을 접하고 체득하셨을까?
선친은 당신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는 듯했다. 선친에게서 당신 아버지에 대한 말씀을 들은 기억이 내게도 거의 없다. 하지만 당신 어머니에 대해서는 말씀을 많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선친은 어머니에게서 밥상머리교육의 실체를 많이 접했던 것 같다. 또 내 할머니께서는 아버지 없이 자라는 어린 자녀들이 남들에게서 '후레자식' 소리를 듣지 않게 하려고 자녀 교육에 매우 엄격하셨던 것 같고, 그것이 밥상머리교육 형태로 고스란히 나타났던 것 같다.
선친은 어린 시절 우물가로 보리쌀을 씻으러 간 형수가 보리쌀 몇 알을 돌판 위에 흘리고 온 것 때문에 어머니에게서 몹시 야단맞는 것을 본 기억을 말하신 적이 있다. 그 일화를 들려주면서 쌀 한 톨, 보리쌀 한 알의 귀중함을 누누이 강조하곤 했다. 밥을 먹을 때마다 천지 조화로 곡물을 생장케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하고, 수없이 땀 흘린 농민들의 수고에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양식이 넉넉지 않아서 꽁보리밥도 남기는 법이 없었지만, 만일 상 밑에 밥알을 흘린다거나 밥그릇 안에 밥풀을 붙여놓고 일어서는 일은 절대 용납되지 않았다.
먹을 것이 지천으로 남아돌고 외식도 자주하게 되는 오늘, 가끔 밥그릇 안에 밥풀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채 숟갈을 놓는 친구들을 본다. 그때마다 내 뇌리에서는 '상놈'이라는 단어가 냉큼 떠오르곤 한다. "밥그릇에다 밥풀을 흉하게 붙여놓고 밥 잘 먹었다고 입술 닦는 놈들은 다 불쌍놈이여!"라고 하셨던 선친의 말도 떠오르고….
집에서 평소에는 식탁을 이용하여 의자에 앉아서 밥을 먹지만, 명절이나 특별한 날 불어난 가족과 함께 두렛상 둘레에 다리 개고 앉아 식사를 할 때는 옛날의 식사 풍경을 떠올리며 선친에게서 받았던 밥상머리교육을 소개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한다.
우리 고장에 전기도 없던 시절, 등잔불이나 남폿불 밑에서 방 안에 동그란 상을 놓고 가족이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던 정경은 동화 속 풍경과도 같다. 비록 누추하고 꾀죄죄한 살림이었지만, 그 밥상 둘레에는 가족 간의 대화가 있었고 가장인 아버지의 온화하면서도 엄한 가르침이 있었다.
남자는 바르게 다리 개고 앉아서 밥을 먹어야 한다, 손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함께 쥐고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 음식 씹는 소리와 젓가락 소리를 내서는 안 된다, 어른이나 윗사람이 먼저 숟가락을 든 후에 밥을 먹어야 한다 등등은 기본이었다. 그리고 우리 고장에 성당 공소가 자리하기 훨씬 전부터 우리 집에는 '식사 전/후 기도'가 있었다.
쌀을 씻을 때마다 어머니는 쌀알 하나라도 흘릴까봐 조심을 했고, 어쩌다 수채 구멍 앞에 쌀 몇 톨이라도 떨어지게 되면 손으로 일일이 줍곤 했다. 쌀알을 함부로 버리면 '죄로 간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여름에는 꽁보리밥을 바구니에 담아 초가집 처마 밑에 매달아놓고 먹었는데, 어쩌다가 노래기가 기어들어 가는 때도 있었다. 냄새 지독한 노래기가 들어갔는데도, 어머니는 그 밥을 조금도 버리지 않았다. 노래기가 발견된 부분의 밥을 살짝 떠서 개에게 주고, 노래기가 지나갔는지도 모를 표면의 밥을 살살 긁어 퍼서 당신이 잡순 적도 있다.
겨울에는 밥그릇들이 하루 종일 안방 아랫목을 차지하곤 했다. 어머니는 아침에 밥을 많이 해놓고서는 점심과 저녁밥까지 밥그릇들에 뚜껑을 덮어 안방 이불 밑에 묻어두곤 했다. 그래서 밥을 새로 짓지 않아도 밥은 늘 따뜻했다.
그런데 아버지의 밥이 늘 가운데에 있었다. 아버지의 밥은 놋그릇에 담겨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한번은 누님이 밥상에다 아랫목 이불 속의 밥그릇들을 옮겨놓을 때 아버지 밥그릇보다 다른 밥그릇을 먼저 올려놓은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즉시 시정을 명령했다. 누님은 즉각 그 밥그릇을 내려놓고 아버지 밥그릇부터 올려놓아야 했다.
어머니는 밥을 풀 때도 주걱 든 손으로 성호를 그은 다음 당연히 아버지의 밥부터 푸곤 했다. 지금처럼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는 때가 아니었다.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하고 부뚜막 솥에서 밥을 푸던 시절이었다.
어머니는 쌀과 보리쌀을 섞어서 밥을 했는데, 솥 가운데에다 쌀을 안치기 때문인지, 밥이 익다 보면 쌀이 자연히 가운데로 몰리는 것인지, 하여간 솥 안 가운데에는 쌀밥이 자리하곤 했다. 어머니는 우선 아버지 밥그릇에 쌀밥부터 퍼담고는 나머지는 고루 섞어서 푸곤 했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밥그릇에서 쌀밥 한 숟갈씩을 떠서 어린 자녀들의 밥그릇에 놓아주고 그 대신 보리밥 한 숟갈씩을 가져가시곤 했다. 노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신 적이 많았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밥을 고루 섞어서 푸지 않고 아버지 밥부터 쌀밥 한 그릇을 푼 다음에 뒤섞는 것, 아버지가 자신의 쌀밥을 자녀들에게 고루 한 숟갈씩 나누어주시곤 한 것은 지금도 궁금증을 자아낸다.
두 분이 처음부터 의논을 하고 작정을 한 것인지, 이심전심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내 뇌리에 그리운 그림으로 남아 있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밥을 고루 섞지 않는 것에서 내가 서운한 감정을 갖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일단 그렇게 어머니가 아버지의 권위를 세워 드린 다음 아버지가 어린 자녀들에게 쌀밥 한 숟갈씩을 나누어주고 보리밥 한 숟갈씩을 가져간 것이 더 좋은 '무엇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정교육'에 참으로 세심하게 신경을 썼고, 말로서보다는 삶과 행동으로 자녀들을 가르쳤고, 내 부모의 밥상머리교육은 부엌 부뚜막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천주교계 월간지 <생활성서> 5월호 특집 ‘밥상머리에서 배우다’에 수록된 글입니다.
2010.05.01 14:19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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