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쓴 겹말 손질 (89) 아침조회

[우리 말에 마음쓰기 910] '저녁의 만찬'과 '저녁밥-저녁잔치'

등록 2010.05.08 13:10수정 2010.05.08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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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아침조회

 

..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쳐 학생 3천여 명이 운동장에서 아침조회를 한다 ..  <박원순과 52명-내 인생의 첫 수업>(두리미디어,2009) 25쪽

 

'합(合)쳐'는 '더해'나 '모두 해서'로 다듬고, "3천여(-餘) 명(名)이"는 "3천 명 남짓이"나 "3천이 넘는 사람이"로 다듬어 줍니다.

 

 ┌ 조회(朝會) : 학교나 관청 따위에서 아침에 모든 구성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

 │   - 조회 시간 / 조회를 시작하다

 │

 ├ 아침조회를 한다

 │→ 조회를 한다

 │→ 아침모임을 한다

 └ …

 

아침에 모이는 일을 놓고 '조회'라 합니다. 저는 국민학교 다닐 때부터 군대에서까지 이 '조회'에 끝없이 시달렸는데, 저뿐 아니라 이 나라에서 학교를 다니고 군대에 가야 했던 모든 사람들은 수없이 들볶였습니다(들볶은 사람들은 들볶은 줄을 모를 테지요. 일제강점기부터 벌여 온 이 같은 '군대사열' 아침모임이 어떤 구실을 하고 어떤 마음을 심어 주었는가를 못 느낄 테지요). 군대에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점호'를 한다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일조점호-일석점호'라 했고, 제가 군대에 있을 때에 건의를 해서 '아침점호-저녁점호'로 이름을 고치기는 했는데 요사이에는 어떤 말로 점호를 할는지 궁금합니다.

 

 ┌ 朝(아침) + 會(모이다) = 조회(아침에 모이는 일)

 └ 아침 + 모임 = 아침모임

 

어릴 적에는 '조회'라 하니 그저 '조회'라고만 생각했지, 다른 생각은 아예 하지 못했습니다. 조회가 왜 조회인지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교사이든 동무이든 다른 말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시키는 대로 말하고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며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했습니다. 시키니 글을 쓰고 시키기에 그처럼 생각하며 시키니까 이러한 결대로 따랐습니다. 말 그대로 "아침(朝)에 하는 모임(會)"이라서 '조회'이고, 그러니까 손쉽게 '아침모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었음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 돌이키면, 저야 깨닫지 못한 일이나, 그무렵 교사들은 깨닫지 않은 일입니다. 아니, 깨달으려 하지 않았다기보다 깨달으려는 길이 막혀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꽉 막힌 제도권교육이요, 위에서 내려보내는 대로 아래에서 따르기만 해야 하는 주입식교육이었거든요. 교사들 노릇이란 돈 걷고 몽둥이 들며 시험지 나눠 주는 데에 머물 뿐이었고요. 폐품 모으기로도 경쟁을 붙이고, 방위성금이니 새마을저축이니 하면서 없는 돈 긁어내어 또다시 경쟁이 붙도록 했습니다. 시험 한 가지 경쟁만 있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주말이 되면 동네 골목 쓸고 치우는 경쟁을 붙이고,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 무리지어 줄 맞추어 걷도록 경쟁을 붙였습니다. '생활'이니 '선도부'니 하는 이름으로 동무들끼리 서로 다그치고 감시하는 무서운 그물눈까지 촘촘하게 짜곤 했습니다.

 

이런저런 하루하루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아침모임이란, 말이 좋아 "아침에 모이기"이지, 속내를 살피면 "아침부터 들볶이고 벌받고 매맞는 심판대"라 할 만했습니다. 아침에 모여 좋은 생각을 나누자고 하는 자리가 아니라, 아침에 모여 윽박지르거나 으르렁거리면서 머리통 쥐어박는 자리였습니다. 이런 흐름에서는 삶이 삶답기 어렵고 배움이 배웁답기 힘듭니다. 으스스한 흐름이 감도는 가운데 생각밭은 움츠러들거나 메말라 갑니다. 생각밭뿐 아니라 마음밭이 주눅들거나 한풀 꺾입니다. 저절로 말밭과 글밭은 쑥대밭이 됩니다. 텅 비어 가며 새로운 싹이 움트지 못합니다.

 

우리가 일제한테서 풀려난 지 꽤 오래되었는데에도 우리 깜냥껏 우리 말밭이나 글밭을 가꾸지 못한 뿌리는 이런 제도권학교 아침모임에도 있으리라 봅니다. 아침모임 하나 때문에 우리 말밭과 글밭을 못 가꾸지는 않았습니다. 아침모임 또한 크게 한몫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새 생각과 슬기를 빛내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새 기운과 넋이 자라지 못하도록 짓누르는 이 땅에서는, 새로운 빛깔과 모양새로 뻗어 나갈 말과 글이란 조금도 싹트지 못합니다.

 

 

ㄴ. 저녁의 만찬

 

.. 나는 밤의 '만찬'을 위해 '십장'에게 자주 식권을 얻었다 … 저녁의 만찬을 위해 낮에는 힘겹게 일했다 ..  <한기호-열정시대>(교양인,2006) 187∼188쪽

 

"'만찬'을 위(爲)해"는 "'만찬'을 즐기려고"로 다듬습니다. '식권(食券)'은 그대로 둘 수 있지만, '밥표'로 손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식권'을 '밥표'로 고쳐쓰는 사람을 찾아보기란 대단히 어려습니다. 정부와 한글학회에서 마련한 '순화대상 낱말표'가 있어도 애써 찾아보는 사람이 없고, 찾아보고 낱말을 익혀 두었다 할지라도 널리 쓰지 못합니다. 공장이나 회사 일꾼을 비롯해, 밥집 일꾼 모두 '식권'이라는 낱말만 씁니다. 딱히 이 낱말을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식권은 '식권'일 뿐이니 굳이 다듬거나 말거나 따질 일이 없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식권은 '식권'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식당-식탁-식사-식대-식기-식습관-식문화'로 줄줄줄 가지를 칩니다. 낱말 하나를 놓고 본다면 그대로 쓰는 일은 잘못이나 말썽이 아니지만, 낱말 하나가 어떻게 이어져 있으며 어떻게 이어지느냐를 놓고 살필 때에는 큰 잘못이거나 말썽입니다. 우리 스스로 '밥집-밥상-밥먹기-밥값-밥그릇-밥버릇-밥문화'라는 낱말을 모조리 내버리거나 내동댕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만찬(晩餐)

 │  (1) 저녁 식사로 먹기 위하여 차린 음식

 │   - 조선 호텔로 청하여 만찬을 대접하였소 / 귀향의 만찬을 들면서

 │  (2) 손님을 초대하여 함께 먹는 저녁 식사

 │   - 만찬을 열다 / 성대한 만찬을 베풀다

 │

 ├ 밤의 만찬을 위해

 │→ 밤잔치를 하려고

 │→ 밤잔치를 생각하며

 │→ 밤잔치를 즐기려고

 └ …

 

저녁에 먹는 밥을 일컬어 한자말로 '만찬'으로 적습니다. 우리 말로는 저녁에 먹는 밥은 '저녁'이거나 '저녁밥'입니다. 아침에 먹으니 '아침'이거나 '아침밥'입니다. 낮에 먹으니 '낮밥'이나 '점심'이나 '점심밥'입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아침-낮밥(점심)-저녁'이 밀려나거나 잊혀집니다. '조찬(朝餐)-오찬(午餐)-만찬'이 끼어들거나 스며듭니다. 우리 말로 이야기를 하면 낮춤말인 듯 여기고, 한자말로 이야기를 하면 높임말인 듯 섬깁니다. 우리 말로 우리 삶을 나타내지 않고, 우리 말로 우리 넋을 가꾸지 않습니다.

 

 ┌ 저녁의 만찬을 위해

 │

 │→ 저녁 잔치를 하려고

 │→ 저녁 잔치를 즐기려고

 └ …

 

남달리 차리는 밥자리라 한다면, '아침잔치-낮잔치-저녁잔치-밤잔치'라 하면 됩니다. 따로 '밥잔치'나 '먹는잔치'라는 낱말을 지을 수 있습니다. '도르리'나 '도리기'라는 낱말이 예부터 있었고, '밥술잔치'처럼 살을 입히며 새 낱말을 지어도 됩니다. 생각줄을 붙잡으며 말줄을 튼튼히 다지면 좋겠고, 마음줄을 돌아보며 글줄을 힘차게 다독이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5.08 13:10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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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말 #중복표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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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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