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리 찾아 제구실해야 할 (43) '것'

[우리 말에 마음쓰기 909]우리가 버린 우리말투 찾기 '것'

등록 2010.05.06 15:18수정 2010.05.0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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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붙인 것은 잘못이라는 것

 

.. 여름의 평원을 내려다볼 만큼 자유로워진 나는 처음으로 그 땅의 어떤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었고, 불모지란 모욕적인 이름을 그 땅에 붙인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  <팔리 모왓/장석봉 옮김-잊혀진 미래>(달팽이,2009) 120쪽

 

"여름의 평원(平原)"은 "여름 들판"으로 다듬고, "그 땅의 어떤 아름다움을"은 "그 땅에 깃든 아름다움을"이나 "그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로 다듬으며, "느끼게 되었고"는 "느꼈고"나 "느낄 수 있었고"로 다듬어 줍니다. '자유(自由)로워진'은 그대로 두어도 되나, '느긋해진'이나 '홀가분해진'이나 '마음이 가벼워진'으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불모지(不毛地)'는 그대로 둘 때 한결 나을 수 있으나 '메마른 땅'으로 손질할 수 있으며, '모욕적(侮辱的)인'은 '깔보는'이나 '낮잡는'이나 '깎아내리는'으로 손질하며, "이해(理解)하게 되었다"는 "알았다"나 "알 수 있었다"나 "알아차렸다"로 손질해 봅니다.

 

몇 줄 안 되는 보기글이지만 이모저모 잔뜩 손보거나 손질합니다. 이 보기글은 이 글월대로 뜻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만, 뜻만 헤아릴 수 있다고 해서 모두 말이나 글이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픈 배만 채운다고 해서 모두 밥이 아니요, 살아갈 돈만 번다고 해서 모두 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뜻은 뜻대로 헤아릴 만하면서 말이라면 말다워야 하고 글이라면 글다워야 합니다. 창작은 창작대로 글다움을 건사하고 번역은 번역대로 글다움을 지켜야 합니다.

 

누구나 쓰는 글이면서 아무나 써서는 안 되는 글입니다. 어떤 이야기든 쓸 수 있는 글이면서 아무렇게나 쓸 수 없는 글입니다. 낱말 하나에 온 넋을 담는 글이요, 말투 하나마다 온 마음을 쏟는 말입니다.

 

나한테 익숙하거나 오래도록 배어든 대로 쓴다고 해서 가장 잘 쓰는 글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쓰되, 내가 선 자리가 얼마나 곧고 바르고 참되고 착하고 고운가를 되돌아보면서 제대로 갈무리하지 못한 대목을 살피면서 차근차근 가다듬는 가운데 쓰는 글입니다. 날마다 내 삶을 새로 추스르면서 쓰는 글이요, 꾸준히 내 삶터를 일구면서 새삼스레 쓰는 글입니다.

 

 ┌ 이름을 그 땅에 붙인 것은

 │

 │→ 이름을 그 땅에 붙인 일은

 │→ 이름을 그 땅에 붙인 모습은

 │→ 이름을 그 땅에 붙인 사람은

 └ …

 

창작하는 사람이나 번역하는 사람이나 글 하나만으로 먹고살기란 더없이 팍팍합니다. 좀더 오래도록 글을 여미거나 다독일 수 있다면 말잘못이나 글잘못이란 크게 줄어들리라 봅니다. 아무래도 너무 바빠 맞은 이 누리에서 살림을 꾸리자니 어쩔 수 없이 뒤틀리거나 뒤엉킨 말글이 쏟아집니다. 하도 바빠 맞기 때문에 웬만큼 뒤틀리거나 뒤엉킨 말글이란 아예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이냥저냥 지나칩니다.

 

그런데 우리 말글을 엉터리로 쓰는 사람들은 '시적 허용'이라는 말까지 들먹입니다. 싱그럽고 알맞게 쓸 마음 없이 그냥저냥 함부로 쓰면서, 영어를 잘못 쓴다든지 일본말을 잘못 쓴다든지 하면 아주 낱낱이 따지고 날카롭게 나무랍니다. 어설프거나 어줍잖게 쓰는 외국말을 놓고는 핀잔을 하면서, 정작 우리 이웃하고 우리 말을 옳고 바르게 나누지 못하는 매무새를 놓고는 팔짱을 낍니다. 어쩌면 우리 스스로 옳은 말을 모르고 바른 글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쓰거나 엉터리로 쓰는 말글을 하나도 못 느끼는지 모릅니다. 참말을 모르고 참글을 모르니 거짓말과 거짓글을 가릴 줄 모르는구나 싶습니다.

 

 ┌ 잘못이라는 것을

 │

 │→ 잘못임을

 │→  └ …잘못인 줄을

 │→ 잘못이었음을

 

뒷돈을 먹는 정치꾼도 잘못이지만 엉터리 말을 쓰는 여느 사람도 잘못입니다. 담배꽁초를 길에 버리는 일도 잘못이요 길을 걸어가면서 담배를 피우느라 다른 사람을 숨막히게 하는 일도 잘못입니다. 저마다 스스로 잘못임을 느끼지 못할 뿐, 잘못 아닌 일이 아닙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틀렸다고 해서 따끔하게 나무라거나 꾸짖으면서 바로잡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은 누구나 틀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맞춤법과 띄어쓰기는 전문학자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따져야 할 대목은 말다운 말을 쓰느냐와 글다운 글을 쓰느냐입니다. 제대로 말이 되도록 나누려는 말인지를 살피고, 올바로 글이 되도록 펼치는 글인지를 살필 노릇입니다.

 

미국땅에서 살아가는 미국사람은 바로 그 미국땅에서 미국사람하고 오순도순 주고받을 미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는 데에 눈길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운다고 할 때에는 바로 '영어를 쓰는 사람하고 옳고 바르게 생각을 나누는 데'에 눈길을 둡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은 다름 아닌 이 한국땅에서 한국사람하고 알뜰살뜰 주고받을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는 데에 생각을 맞추어야 합니다. 가장 영어다운 영어를 쓰듯 가장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써야 올바릅니다. 가장 일본말다운 일본말을 배우듯 가장 한국말다운 한국말을 배워야 알맞습니다.

 

창작을 하는 사람이든 번역을 하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전문가나 지식인뿐 아니라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살림을 꾸리는 사람 또한 매한가지입니다. 지식을 내세우는 말은 올바른 말이 아닙니다. 겉치레를 번드레하게 하는 말 또한 참다운 말이 아닙니다. 삶과 생각을 나누면서 속 알맹이를 튼튼히 다스리는 말이 참다운 말입니다.

 

'것'이라는 말은 넣을 만한 자리에는 넣을 수 있고 넣어야 하지만, 넣을 만한 자리가 아닐 때에는 넣지 말아야 하며 넣어서는 안 될 자리에는 넣어서는 안 됩니다. 제자리를 살피고 제몫을 느끼며 제구실을 찾아야 할 말이요 글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5.06 15:18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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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말익히기 #글다듬기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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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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