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폐하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 그 팽팽한 긴장

[서평] '2009 용산참사'를 바탕으로 한 소설 <소수의견>

등록 2010.05.20 13:27수정 2010.05.20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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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벌어지는 일들이 벌어졌지요. 그놈들이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망루로 진입해서 우리들은 망루로 도망쳤어요. 나하고 신우는 2층에서 그놈들한테 붙들렸지요. 한 놈이 신우를 때리기 시작했고, 나는 몸에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이겠다고 소리쳤습니다. 사상자가 나오면 그 쪽도 입장이 곤란해진다는 걸 잘 알고 있었거든요.

 

우리도 그건 잘 압니다. 그놈들은 우릴 두고 옥상에 올라갔죠. …얼마 안 있어서 경찰이 들어왔고, 나하고 신우를 발견하곤 강제로 끌어내려고 했어요. 그 애는 창틀을 붙잡고 매달렸어요. 그리고 강제로 떼어내려는 경찰의 손을 깨물었지요. 경찰이 손목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고 피가 났어요. 그러자 경찰 대여섯 명이 사납게 달려들더군요." - <소수의견> 중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박재호씨는 아현동 재개발지역 철거민이다. 그는 특수공무집행방해치사 혐의로 기소되어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그를 기소한 사람은 경찰, 철거민들의 시위를 진압 중이던 전경 하나가 죽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박재호씨의 아들 신우도 죽었다. 그의 아들은 이제 겨우 16살. 그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은 진압 중이었던 경찰이라고, 자신은 아들을 구하고자 했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하지만 경찰은 신우를 죽인 것은 전경이 아닌 용역깡패라고 주장하며 책임을 회피한다.

 

박재호씨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있는 화자인 나 윤변호사는 30세 후반이다. 사법연수원을 졸업하던 몇 달 전까지 법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했었다. 난 결국 국선변호사로 법조인의 첫 발을 내딛었고, '유령처럼 민변을 떠돌던' 박재호 사건을 맡게 된 것이다.

 

"단지 여론을 환기하려는 목적이라면 청구배상액은 크게 의미가 없지요. 청구금액이 너무 크면 판사에게 심적 부담만 안겨줄 겁니다. 판사가 청구를 인용한다 해도 철거민들의 농성 자체가 불법했기 때문에 배상금은 어차피 상당액 과실 상계될 테죠. 저라면 100원을 청구 하겠네요."

 

동의한다. 진심으로, 멋진 아이디어였다. 이 전략은 시어도어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의 1달러 소송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은 법정의 시위이다. 이것은 정의의 청구이며, 이것은 소송을 탐욕으로 깎아내리는 자들에게 내리는 묵언이다. 마음이 기울어도 배상의 형평을 저울질해야 하는 판사와 자극적인 소재를 찾아 헤매는 언론 모두에게 호소력을 가질 혜안이었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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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견>겉그림 ⓒ 들녘

<소수의견>겉그림 ⓒ 들녘

'국선전담변호인이 된 이후 몇 달 동안 한 달에 서른 건 꼴로 사건을 맡았고, 하루 다섯 통씩이나 늘어나는 명함을 보관하는 나 윤변호사가 국선변호사를 놓지 못하는 이유는 매달 국가로부터 일정한 돈을 지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나는 계란으로 바위치기 격인 박재호 사건을 위해 국선변호사를 그만두고 국가를 상대로 100원 소송을 시작한다. 게다가 '국민 참여재판'까지 신청한다.

 

100원 소송이 언론에 노출되면서 사건은 유명해지고 어떤 목적을 노린 정치인과 언론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나 윤변호사도 언론과 사람들에게 주목받게 된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박재호 사건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고 만다.

 

아니, '거대한 손이 대중을 의식한 자신의 이력을 위해 가로채고 말았다'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몰린다.

 

대한변호사협회가 '변호사의 품격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징계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변론을 준비하며 철거현장에 갔고, 자신이 알고 있는 기자가 전경들에게 폭행당하자 구하고자 했을 뿐인데.

 

또한, 회유와 압박 등, 어떻게든지 책임을 회피하려는 국가권력의 암묵적이고 위협적인 별별 일들이 벌어진다. 신변이 위험할 만큼의. 와중에 힘없는 사건을 도우려는 변호사와 법학대교수가 나타나는가 하면 용역깡패에게 지시한 전직 경찰관이 양심선언을 하기도 한다.

 

"뒤통수를 각목으로 때리면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예견 가능합니다. 경찰은 그래서 헬멧을 씁니다. 근데 왜 하필 피해자 김희택이 헬멧을 벗은 때를 노려서 때렸을까요?" 박재호는 발언권을 얻기도 전에 외쳤다. "죽일 생각은 없었습니다. 전 제 자식을 구해야 했단 말입니다. 그냥 손에 잡힌 것을 막 휘둘렀을 뿐이라고요."

 

"왜 하필 헬멧을 벗은 피해자의 뒤통수였죠? 헬멧을 쓴 다른 경찰을 때리거나, 다리나 옆구리를 때려도 되지 않았나요? 각목이 우연히 머리에 맞았단 말인가요?"

 

"저는 정신이 없었단 말입니다. 그 전경이 왜 헬멧을 벗어 들고 있었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박재호는 울먹이려 했다. 검사는 차가운 눈빛으로 박재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난 깨달았다. 잡혔다.

 

"정신이 없었다면서요? 그런데 피해자 김희택 씨가 헬멧을 벗어서 들고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계셨단 거네요? 머리를 노려 때린 행동이 정당방위라는 겁니까?" 박재호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나에게 중얼거렸다. 이런 바보. 병신 같은 놈. 나가 죽어. 헬멧.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대책을 세워놨어야 했는데. - 책 속에서

 

나도 모르게 '앗! 이럴 수가?'라며 가슴 철렁하게 읽은 부분이다. 화자인 나 윤변호사처럼 독자인 나 역시 이런 복병이 기습하리란 생각을 전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장난 때문에 소설이 재미있지 않아도 좋으니 국가가 이제라도 정직하게 사죄하기를 바랄 뿐.

 

우여곡절 끝에 사건은 다시 나 윤변호사에게 돌아온다. 그러나 피고 박재호는 이처럼 검사의 야비하고 집요한 말 한마디 그 함정에 얼떨결에 걸려들고 만다. 검찰은 철거민 박재호에게 중형을 구형할 태세다. 그는 어떻게 될까?

 

"2009년, 경찰은 서울시 용산구의 재개발사업 부지를 점거한 지역 세입자들을 진압했다. 화재가 일어났다. 여섯 명이 사망했다. 검찰은 현장을 살아남아 빠져나온 세입자들을 기소했다. 화재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죽은 자들의 몸은 부검되었고, 산 자들의 몸은 철창에 던져졌다. 산 자들은 실형을 선고 받았다. …그 어떤 창조적인 상상력으로도 현실을 따라 잡을 수가 없다. 유감이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소수의견>(들녘 펴냄)은 '2009년 1월의 용산 참사'를 연상시키는 소설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와 어떻게든 진실을 밝혀내려는 자의 논쟁으로 팽팽하다. 둘의 공방이 긴장과 함께 엎치락뒤치락하기 때문에 흥미롭게 소설에 빠져들게 된다.

 

이 소설은 아현동재개발 지역 철거민 박재호 사건에 기초를 두고 있지만, 단지 박재호의 이야기로 국한되지만은 않는다.

 

소설은 우리 사회에 당연한 일이 되어버린 재개발 때문에 일어난 살인사건을 통해 재개발과 관련된 비리와 그것을 어떻게든 은폐하려는 국가권력의 실체, 국가의 비리를 감추는 수단으로 전락한 법의 실체를 들려줌으로써 우리에게 묵직한 화두와 메시지를 전하기 때문에.

 

'은평뉴타운 공사현장에서 사체 1구가 발견되는데 살인교사자인 깡패두목은 무죄로 풀려난다? 경찰의 범죄를 덮고자 깡패를 회유한 검사가 검찰에서 물러나나 '전관예우'속에 성공적인 변호사 생활을 한다?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이며 법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우리의 수많은 재개발들은 진정 무엇을 위한 누구의 것인가?'

 

그동안 이처럼 은폐되었을 수많은 범죄들도, 활활 타오르던 불기둥 속 절규로 기억되고 있는 용산참사도 자꾸 떠올라 비장하게 읽혔다. 솔직히 이 소설은 권력이라든가 우리사회 일부 상위층들이 누리는 특별하고 각별한 혜택들과 전혀 상관없는 내게는 다소 분노로 다가왔다.

덧붙이는 글 | 소수의견|손아람 (지은이)|들녘(코기토)|2010-04-26 |정가 : 12,000원
 

2010.05.20 13:27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소수의견|손아람 (지은이)|들녘(코기토)|2010-04-26 |정가 : 12,000원
 

소수의견

손아람 지음,
들녘, 2015


#용산참사 #철거민 #재개발지역 #뉴타운 #국가와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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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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