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의 무덤과 함께 숙종·인원왕후의 무덤이 있는 명릉. 경기도 고양시에 소재한 서오릉 안에 이 무덤이 있다.
서오릉 홈페이지
숙종이 인현왕후 폐위한 진짜 이유숙종 6년(1680) 경신대출척 이후 정권을 잡은 쪽은 서인 당파였다. 그런데 서인의 집권은 숙종 15년(1689)에 다가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인의 집권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정치환경이 조성된 탓이었다. 그 환경이란 것은 장희빈의 아들인 이윤(훗날의 경종)의 출생이었다.
신생 왕조의 활력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자손이 번성했던 전기 조선과 달리, 후기 조선에서는 왕실에 손(孫)이 매우 귀했다. 손이 귀하다는 것은 왕실의 연속성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숙종 입장에서는 첫아들인 이윤의 후계자 지위를 조속히 확정할 필요가 있었다. 출생 이듬해인 숙종 15년(1689)에 이윤이 예비 후계자인 원자에 책봉된 데 이어, 다시 그로부터 1년 뒤인 숙종 16년(1690)에 정식 후계자인 세자에 책봉된 사실은 후계구도 안정에 대한 숙종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인의 지지를 받는 이윤을 중심으로 한 후계구도의 정착은 집권여당인 서인의 기반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윤 중심의 후계구도 확립을 둘러싼 이해관계의 대립은 결국 숙종 15년(1689)의 기사환국으로 분출되었다. 이 때문에 불거진 정쟁으로 송시열이 사약을 받는 등 서인 지도부가 대대적인 타격을 입는 동시에, 남인이 9년 만에 재집권에 성공하는 정치변동이 발생했다.
숙종이 여당을 교체한 핵심적인 동기는, 자신이 구상한 후계구도를 반대하는 당파와는 손을 잡고 국정을 운영할 수 없다는 판단에 있었다. 동시에, 그것은 특정 당파가 너무 커지기 전에 싹을 자르는 숙종 특유의 통치스타일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했다.
숙종시대의 정치변동에서 나타난 특징은 당쟁과 여인천하가 긴밀히 연동됐다는 점이다. 당쟁의 승패가 여인천하의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이러한 패턴을 반영하기라도 하듯, 서인정권이 무너지면서 인현왕후도 함께 무너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인현왕후의 폐위는 기본적으로 서인정권의 몰락과 연동된 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아무리 당쟁과 여인천하가 연동됐다고 하더라도, 단순히 서인정권이 붕괴됐다는 이유만으로 숙종이 인현왕후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서인을 내몬 여세를 몰아 인현왕후까지 내몰려면, 인현왕후에게서 뭔가 문제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장 희빈과 숙종에 대한 저주, 화 불렀다숙종이 인현왕후에게서 발견한 문제점은 <숙종실록>의 여러 군데에서 나타난다. 여러 기록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숙종 15년(1689) 5월 2일자 <숙종실록>에 실린 숙종의 비망기(備忘記)다. 비망기란 것은 승지(비서)에게 전달된 임금의 명령문이다. 숙종이 작성한 비망기에는 인현왕후 폐위의 사유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왕후는) 투기하는 것 외에도, 별도로 간특한 계략을 만들어내 역대 왕과 왕후의 명령을 꾸며 공공연히 큰소리로 '그(장희빈)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기 때문에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무 소용도 없고, 중궁전에는 자손이 많을 것이니 선조 때와 다름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내게 말했다. 이런 말은 삼척동자라도 믿지 않을 게 분명하다. 하물며, 이제 조상들이 도우셔서 세자가 태어남으로써 (왕후의) 흉한 계략이 더욱 더 드러났으니, 누구를 속이겠는가?"비망기에 따르면,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데에는 장희빈에 대한 투기 외에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국본(國本) 즉 세자의 생산을 두고 인현왕후가 허무맹랑한 저주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비망기에 의하면, 인현왕후는 평소에 "장희빈의 팔자에는 본래 아들이 없기 때문에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것"(其八字本無子, 主上勞而無功)이라며 막말을 일삼았다. 근거 없는 사주풀이를 동원해서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를 갈라놓으려 했던 것이다.
인현왕후는 숙종과 장희빈을 갈라놓기 위해 그 같은 비난을 일삼았겠지만, 그런 비난이 숙종의 귀에는 또 다른 의미로 들렸던 것 같다. 숙종 입장에서는 장희빈에 대한 비판보다는 '주상께서 애쓰셔봤자 아들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부분이 한층 더 불쾌하고 노여웠던 모양이다. 하루라도 빨리 후사(後嗣)를 양성해 후계구도를 안정시키려는 숙종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는 것과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막말을 꾹 참아온 숙종은 세자가 태어나고 그 지위가 안정된 뒤에야 비로소 속에 담아 두었던 분노를 거침없이 표출했다. "이제 조상들이 도우셔서 세자가 태어남으로써 흉한 계략이 더욱 더 드러났으니 누구를 속이겠는가?"라고 숙종은 퍼부었다. '중전의 사주풀이가 맞는다면 세자 이윤이 왜 태어났겠느냐?'며 인현왕후를 공격한 것이다.
위와 같은 기록을 보면, 인현왕후 폐위는 왕후의 배후세력인 서인 정권이 붕괴함에 따른 결과인 동시에, 숙종의 후사 생산을 놓고 평소 막말을 일삼던 인현왕후에 대한 숙종의 분노가 폭발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개인적 동기 중 하나는, 왕후가 평소에 근거 없는 정보를 동원해서 숙종의 후사 생산과 관련해 모독적인 발언을 일삼은 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근거 없는 사주풀이로 무책임하게 국본을 뒤흔들고 또 왕실의 번성보다는 개인의 영화를 우선시하는 여인에게 더 이상 '기호 1번'을 맡겨서는 안 된다는 판단 하에, 숙종은 인현왕후 폐위라는 구국의 결단을 과감히 내리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인현왕후 폐위는 장희빈 탓이라기보다는 인현왕후 자신의 탓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인현왕후 폐위로 여인천하의 일단락을 마감한 드라마 <동이>. 이제 궐에 남게 될 여인은 최 숙빈과 장 희빈이다. 인현왕후가 없는 궐에서 최 숙빈과 장 희빈이 향후 어떤 대결을 펼쳐나갈지 관심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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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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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 1번' 인현왕후 폐위 사유는 '뒷담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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