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궂은 한자말 덜기 (99) 저렴

[우리 말에 마음쓰기 923] '저렴한 음식 재료'와 '값싼 먹을거리'

등록 2010.06.02 09:32수정 2010.06.02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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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렴 : 저렴한 음식 재료

.. 입에 들어가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일상적이고 저렴한 음식 재료다 ..  <요네하라 마리/이현진 옮김-미식견문록>(마음산책,2009) 66쪽


"없을 정도(程度)로"는 "없을 만큼"이나 "없도록"으로 다듬고, '일상적(日常的)이고'는 '흔히 먹고'나 '자주 먹고'나 '늘 먹고'나 '언제나 즐기고'로 다듬습니다. "음식(飮食) 재료(材料)"는 "먹을거리"나 "밥거리"로 손질해 봅니다.

 ┌ 저렴(低廉) : 물건 따위의 값이 쌈
 │   - 저렴한 가격 / 물건값이 저렴하여 늘 많은 사람이 모인다
 │
 ├ 저렴한 음식 재료다
 │→ 값싼 먹을거리이다
 │→ 값이 싼 밥거리이다
 └ …

쉽게 쓰면 될 말을 쉽게 쓰지 않는 우리들인 탓에 '싸다'와 '값싸다'와 '눅다' 같은 우리 낱말이 있어도 '저렴'이라든지 '염가(廉價)'라든지 하는 한자말을 끝끝내 끌어들이고 있습니다. '에누리'라는 낱말이 있고 '싸게 팔기'나 '깎아 팔기'라 하면 넉넉하지만, '할인 판매(割引 販賣)'나 '염가 판매'나 '바겐세일(bargain sale)'이라 말하며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싸구려로 내모는 셈이고,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깎아내리는 꼴이며,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을 업신여기는 노릇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이 제값을 하도록 애쓰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이 제힘을 내도록 힘쓰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글이 제자리를 찾도록 마음쓰지 않습니다.


꾸밈없이 말하고 꾸밈없이 나누는 매무새를 잃고 있습니다. 수수하게 말하고 수수하게 어깨동무하는 매무새를 잊고 있습니다. 넉넉하게 말하며 넉넉하게 껴안는 넋을 버리고 있습니다. 따스하게 말하며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품을 내동댕이치고 있습니다.

 ┌ 저렴한 가격 → 싼값 / 눅은 값 / 낮은 값 / 착한 값
 └ 물건값이 저렴하여 → 물건값이 싸서


한자말 '저렴'이란 다름아닌 "값이 쌈"을 뜻할 뿐입니다. "저렴한 가격"이란 우리 말로는 한 마디로 '싼값'입니다. 조금 길게 말한다 할지라도 '낮은 값'이나 '눅은 값'입니다. 토박이말로 아무리 길게 말하려 한달지라도 더 길게 쓸 수 없습니다. '저렴하다'라 하면 네 글자이고, '싸다'라 하면 두 글자입니다.

길이가 짧을 때에 더 나은 낱말은 아닙니다. 그런데 뭇사람들이 토박이말을 잘 안 쓰려 하면서 내놓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토박이말로 말하면 길어진다'입니다. 어느 때에는 좀 길어지게 말할 수 있고 어느 때에는 좀 짤막하게 말할 수 있는 말삶인데, 우리들은 이런 대목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욱이, 한결 짧고 단출하며 쉽고 맑은 말마디를 아끼거나 사랑하지 못합니다.

 ┌ 저렴한 해외여행
 │→ 값싼 외국여행
 │→ 값싸게 다녀오는 나라밖 마실
 │→ 적은 돈으로 즐기는 나라밖 나들이
 ├ 간단! 저렴! 맛나는 도시락 반찬
 │→ 쉽고! 싸고! 맛나는 도시락 반찬
 ├ 저렴이로 추천해 주세요
 │→ 싼것으로 알려주세요
 │→ 싼놈으로 알려주세요
 │→ 싼 녀석으로 알려주세요
 └ …

우리는 우리 말 '싸다'와 '값싸다'를 알뜰히 보살피지 못하기 때문에, 뒤따르는 다른 낱말과 말투 또한 알뜰히 보살피지 못합니다. 값싼 물건을 일컫는 '저렴이'라는 낱말을 새로 지어서 쓸 줄은 알지만, '싼둥이'나 '값싼둥이' 같은 낱말을 지어서 쓸 줄은 모릅니다.

한자말이든 영어이든 쓰면 '값이 싸더라도 싼 티가 안 나는 줄' 여기고, 토박이말로 쓰면 값이 쌀 뿐 아니라 싼 티가 풀풀 나는 줄 여깁니다. '똥'이라 하면 냄새나고 더럽다 여기고, '변(便)'이라 하면 냄새가 덜 나거나 안 나는 줄 여기는 모습하고 같습니다. '돈'이라 하면 싸구려로 여기고, '경제'나 '커미션'이나 '자금'이나 '기금'이나 '성금'이라 하면 무언가 달라지는 듯 여기는 매무새와 마찬가지입니다.

 ┌ 가격대가 저렴하다는 것
 │→ 값이 싸다는 대목
 ├ 저렴하게 구입
 │→ 싸게 사다
 │→ 값싸게 장만
 │→ 적은 돈으로 마련
 ├ 국제통화의 경우는 더 큰 폭으로 저렴하다
 │→ 국제통화는 더 많이 싸다
 │→ 국제통화라면 더욱 싸다
 └ …

'저렴'이라는 한자말은 '가격'이라는 또다른 한자말하고 잘 어울립니다. '저렴'이라는 한자말은 '구매'나 '구입' 같은 또다른 한자말하고 알맞게 어울립니다. '싸다'라는 토박이말은 '값'이라는 토박이말하고 잘 어울립니다. '싸다'라는 토박이말은 '장만하다'와 '마련하다' 같은 토박이말하고 알맞게 어울립니다.

한 번 맛들이면 두 번 세 번 쓰고 마는 말마디입니다. 두 번 세 번을 거치는 동안 어느덧 말버릇으로 굳어지는 말마디입니다. 착하며 고운 말마디이든 짓궂으며 몹쓸 말마디이든 사람들 누구나 말버릇이 됩니다. 따뜻하며 좋은 말마디이든 차가우며 끔찍한 말마디이든 사람들 누구나 말버릇으로 굳어집니다.

우리는 우리 말버릇을 비롯하여 우리 삶자락을 아름다이 추스를 수 있는 한편, 우리 말버릇뿐 아니라 우리 삶자락을 엉터리로 깎아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말을 더없이 고우며 어여삐 북돋울 수 있는 한편, 우리는 우리 말을 그지없이 바보스럽거나 얄궂게 짓밟거나 내팽개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말사랑이나 글사랑이 아닌 돈사랑이나 권력사랑으로 치닫습니다. 삶을 사랑하지 않는 우리들입니다. 학벌을 사랑하고 아파트와 자가용을 사랑하는 우리들입니다. 적은 돈으로 나누는 사랑을 잊고 있으며, 돈이 없어도 어깨동무할 믿음을 잃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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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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