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패'.
3일 새벽을 맞은 한나라당 수뇌부와 당직자들이 가장 먼저 떠올린 단어다. 2일 밤 개표 결과, 한나라당은 텃밭 4군데와 서울-경기도 만을 겨우 건져냈다. 16개 광역자치단체 중 불과 6곳 밖에 없었다. 시쳇말로 '본전도 못 건진' 싸움이었다.
기초자치단체장 선거 결과를 보면 더 심각하다. 영남을 제외하고 한나라당이 압승한 곳은 단 1곳도 없다. '종이 한 장 차이' 지지율로 겨우 이긴 서울과 경기도에서도 시장-구청장은 거의 야당에 내줬다.
그 결과, 이번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사실상 '영남당'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영남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버팀목이 됐던 경남마저 잃었다. 상대는 지난 대선에서 완벽하게 짓밟았던 '친노' 무소속 후보였다. 한나라당 역사상, 이렇게 비참한 패배는 없었다.
한나라당의 비통함은 개표 당일 여의도 당사의 황량함에서 잘 드러났다. 3일 새벽, 한나라당사에서는 정몽준 대표와 득의양양한 후보들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벽에 꽂혀야 할 '무궁화'도 보이지 않았다. 6.2 지방선거를 끝낸 한나라당사는 깊은 신음과 한숨, 어둠 속에 가라앉았다.
'선거용 이벤트' 북풍, 보수언론 공세에도 민심 '잠잠'
개표 직전만 해도 한나라당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수도권 3곳은 물론, 접전지로 분류된 충남, 충북, 강원까지 "싹쓸이 할 수 있다"며 기세등등했다. 한나라당이 믿은 것은 바로 전날까지 발표된 여론조사였다. 최소 10%포인트 이상 차이로 압승. 하지만 개표 결과, 여론조사는 한낱 휴지조각에 불과했다.
한나라당과 여론조사기관이 보지 못한 것은 민심의 깊이였다. 또 국민들의 '시력'이었다.
지방선거 직전, 무상급식과 4대강 사업, 세종시 수정안, 스폰서 검사, 한명숙 재판 등으로 위기에 몰린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반전의 기회를 노렸다. 3월말, 때마침 천안함 침몰 사건이 터졌다.
때를 잡은 정부 여당은 북풍을 불러왔다. 한달 이상 보수언론의 지원을 받으며 '북한 소행' 군불을 지피더니, 급기야 지난달 20일 국방부는 파란색 잉크로 '1번'이라고 적힌 "북한산 어뢰"를 국민 앞에 내놨다. 공식 선거운동 첫날이었다. 나흘 뒤 이명박 대통령은 전쟁기념관에서 '대북 봉쇄'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면서 사실상 한반도에 '준전시상태'를 선포했다.
북풍이 일어나면서 한나라당 후보들의 지지율은 급등하기 시작했다. 서울과 경기는 20%포인트 이상 격차가 났다는 보도가 연일 매스컴에 오르내렸다.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은 여론조사 결과 마치 북풍이 민심의 흐름을 바꿔 놓은 것처럼 지면을 도배했다.
KBS, MBC, SBS 등 방송사도 한편에 섰다. 보수 언론의 공세에 야당은 "도가 지나치다"고 반발하면서 불안감을 떨쳐 버리지 못했다. 부정확한 보도가 야당 지지자들의 '패배주의'를 부추기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하지만 투표 결과, 북풍은 서해 위를 떠돌던 '해풍'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민심의 바다 밑을 깊게 흐르는 '해류'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보수언론의 북풍몰이에도 민심은 잠잠했다.
더구나 국민은 북풍의 실체를 정확히 보고 있었다. '오비이락'처럼 선거철에 맞아떨어진 민군합동조사단 발표와 대북 강경조치가 결국 지방선거용이었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북풍이 '역풍'이 될 조짐을 보이자 한나라당은 뒤늦게 "천안함 정쟁 중단"(27일 정몽준 대표)을 선언했다. 그러나 너무 늦은 조치였다.
국민들은 보수 언론의 공세 속에서도 선악을 구분할 만큼 현명했다. 트위터와 블로그 등을 통해 정보를 나누고 뭉친 국민들은 끝내 북풍보다 'MB심판론'을 택했다. '선거용 이벤트'의 냄새가 짙은 냉전시대의 전술을 택한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한 경고를 준 셈이다.
'죽다 살아난' 야당, 민심의 명령 들어야
잦은 실수와 오만한 태도도 한나라당의 몰락을 부추겼다. "쥐뿔도 모르는 여성"(선거광고 영상) 등 여성 비하로 여성표를 잃었고, "다행히 천안함이 인천에서"(이윤성 인천시 선대위원장)는 등 발언으로 민심을 자극했다. 당 대표는 전국을 다니며 야당 후보들을 "연탄가스"라고 불러 국민의 혐오감을 자극했다.
2년 반 전에 끝난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고 외친 무책임한 태도도 문제였다. 대북, 경제 등 MB정권 상반기 실정을 몽땅 지난 정권에 떠넘기고자 했던 시도는 '5월 노풍'을 만나 끝내 좌절하고 말았다. MB정권은 "노풍은 없다"며 애써 자위했지만, 바닥에는 "투표로 복수하자"는 심판론이 살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한나라당이 무너진 가장 큰 이유는, 국민들이 "제발 투표해 달라"는 야당의 절박한 호소에 반응했기 때문이다. 투표 종료 3시간을 남겨 놓고 급상승한 투표율이 이를 증명한다. 그 배경에는 '야당이 예쁘다'는 마음보다, '여당이 밉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결과적으로 야당은 국민에게 큰 빚을 졌다. 특히 제1야당 민주당은 이번 지방선거 결과로 가장 큰 열매를 얻게 됐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범야권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다면 국민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야말로 죽다 살아난 셈이다.
민주당은 또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국민참여당에게 갚아야 할 부채가 생겼다. 비록 졌지만, 경기도에서 유시민 후보의 '대추격전'을 가능케 한 진보신당 심상정 후보의 눈물에도 빚이 있다. 민주당이 2012년 대선을 겨냥한다면, 지금 진 빚을 갚고, 2년 반 뒤에도 손을 내밀어야 한다.
민주당을 비롯한 야당이 2012년 다시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할일이 많다. 지방선거 기간 동안 수없이 약속한 '참 좋은 지방정부'를 세우는 게 우선이다. 무상급식 공약을 지키고, 4대강 저지를 완수하고, 세종시 수정안을 막아내는 게 두번째 민심의 명령이 됐다.
6.2 지방선거에서 야당의 상징색(녹색)은 남한 지도를 뒤덮었다. 이같은 '압승'은 대한민국 지방선거 역사상 최초의 일이다. 그만큼 국민의 기대가 큰 법이다. 야당이 또 다시 분열하고, MB정부의 독주에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인다면, 2년 반 뒤 눈물을 삼키는 쪽이 누가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이날 선거 결과로, 국민은 야당에게도 확실한 기회와 따끔한 경고를 동시에 주고 있다.
2010.06.03 09:06 | ⓒ 2010 OhmyNew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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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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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풍' 이겨낸 국민, 'MB 독선' 심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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