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이 24일 오전 서울 용산구 용산동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천안함 침몰사건과 관련한 대국민 담화를 발표하기 위해 심각한 표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호국추모실 복도 양 옆으로는 6·25 전쟁영웅 21명의 흉상이 놓여있다.
청와대
보수세력은 '안보불감증이 극에 달했다"고 불평을 토하겠지만, 'MB발 북풍'은 역풍으로 끝났다.
정부는 천안함 침몰원인에 대한 조사결과 발표를 지난달 20일에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1주기인 5월 23일을 3일 앞둔 시점이었다. 다음 날인 24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전쟁기념관에서 대국민 담화를 했다. 그는 대북교역 중단, 대북심리전 재개 등의 대북조치를 선언했고, 곧바로 국방·외교·통일 장관이 합동기자회견을 통해 이를 뒷받침하고 나섰다.
대국민담화 장소를 전쟁기념관으로 한 것은 전쟁불사 의지를 '과시'한 것이라는 점에서 '북풍 드라이브'의 정점이었다.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를 지방선거 이전에 발표한 것 자체가 이미 천안함 사건을 선거쟁점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 것이었다.
이 대통령이 깔아준 판을 한나라당은 최대한 활용했다. 정몽준 대표는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발표 내용에 대한 의혹 제기를 "북한에서 발표하는 것과 비슷한 얘기들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김문수 후보도 경기지사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유시민 후보를 향해 "김정일과 유시민만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를 안 믿는다"고 맹공했다. 이것이 한나라당의 지방선거 기조였고, 공공연히 전쟁을 언급하는 발언이 이어졌다.
선거 때마다 빠지지 않았던 북풍역대 선거의 단골손님이었던 '북풍'(북한 변수)은 보수세력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1967년 5월 대선을 앞두고 무장간첩 사건을 포함해 간첩사건 5건이 잇달아 발표됐다. 박정희 후보와 김대중 후보가 혈투를 벌였던 1971년 대선 때는 선거 1주일을 앞두고 보안사령부가 서준식씨 등이 포함된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KAL기 폭파사건'은 그 정점이었다. 1987년 13대 대선을 한달여 앞두고 'KAL 858기 폭파사건'이 터졌고, 투표일 전날인 12월 15일 폭파범 김현희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는 양김(김영삼-김대중) 분열 속에 노태우 후보의 당선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정부와 안기부는 이 사건을 노 후보의 당선에 이용하기 위한 '무지개 공작'을 범정부적으로 벌였다.
1992년에는 대선 선거일을 두 달 앞두고 중부지역당 사건이 터졌고, 1996년 4월 15대 총선때는 '판문점 무력시위 사건'이 일어나 나중에 '총풍사건'으로 연결됐다.
그러나 북풍이 거듭될수록 대처 방식도 진화했고 전반적으로 '약발'은 떨어졌다. 1997년 12월 11일 재미 사업가 윤홍준이 중국 베이징에서 "김대중 후보가 북한의 김정일에게서 자금을 받았다"고 기자회견을 했으나, 당시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대행은 대북한 특별경고 성명으로 맞섰다. 북풍에 '면역'된 국민은 집권여당의 '용공' 낙인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대통령을 선택했다.
2000년 4·13 총선 때는 김대중 정부가 투표를 사흘 앞두고 전격적으로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을 발표했으나,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이전과는 다른 차원의 '북풍'이었으나 선거에서는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는 점에서, 북풍이 더 이상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확산됐다.
그리고 천안함 사건이 터졌다. 사건 초기 중심을 잡던 이명박 대통령은 선거가 가까워지자 노골적으로 선거에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방선거의 핵심인 서울과 경기에서 야당 후보들의 추격세가 꺾였고, 야권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들과의 지지율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중앙일보>, SBS, 동아시아연구원의 지난 4월 24일~26일 조사(전국 5개 지역 2천288명을 대상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54.1%가 '천안함 사태가 이번 선거에 영향을 미쳤다"고 대답한 것에서 보이듯, 사건이 최대 선거이슈로 등장했다.
'한반도리스크' 10년만에 재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