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손톱을 기른다, 살아남기 위해

방미진 청소년 소설 <손톱이 자라날 때>

등록 2010.06.08 10:09수정 2010.06.0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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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톱이 자라날 때> 표지 ⓒ 문학동네

청소년 시절에 꽤 유행하던 괴담이 있었다. 만년 2등 아이에게 살해당한 1등이 귀신이 되어 돌아온다는 이야기였다. 늦은 밤, 귀신은 콩콩 소리를 내며 교실 문을 드르륵 연다.

그때마다 귀신은 무언가를 찾는다. 그 소리를 들으며, 홀로 남아 공부를 하던 2등 아이는 몸을 부르르 떤다. 마침내 아이가 있던 교실의 문도 열린다. 머리로 바닥을 콩콩 찍던 귀신은 미소를 짓는다. 이제야 찾았다는 뜻이었다.


그 시절에는 그 이야기가 꽤 재밌었다. 불을 끄고 들으면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지라도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그게 정말 재밌기만 한 것일까. 단지 귀신을 상상하기 때문에 소름이 돋는 것이었을까.

대학생이 되어 그 이야기를 돌아보면서 여러 생각을 했던 것이 생각난다. 왜 2등은 1등을 살해했을까? 증오심에 살해한 건 그렇다 하더라도 귀신이 나오는 학교에서, 왜 혼자 남아 공부를 하고 있어야 했을까? 어쩌면 정말 무서운 건, 그런 사실이 아닐까?

최근에 문득, 철 지난 이야기를 떠올리게 된 건 순전히 방미진의 청소년 소설집 <손톱이 자라날 때> 때문이다. 5개의 소설로 구성된 <손톱이 자라날 때>는 꽤 으스스하다. 가령 첫 번째로 만날 수 있는 '하얀 벽'에서는 죽은 무엇인가가 산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킨다. 맨 뒷자리에 앉은 '나'는 어디선가 벽을 두드리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수업 시간에 누가 그런 짓을 할까? '나'는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벽뿐이다.

하지만 이런 불쾌한 경험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해진다. 불쾌함은 이윽고 공포심을 유발한다. 수업 중에 꼼짝할 수 없는, 가위에 눌리는 일까지 생긴다. 수업 중에 존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랬던 것일까? '나'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이런 마음을 알았다는 듯이 벽이 다가온다. 하얀 벽이, 마치 살해당한 1등 아이가 귀신이 되어 콩콩 소리를 내며 다가오듯,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이다.

'하얀 벽'은 도처에서 소름을 돋게 만든다. 호러적인 느낌 때문일까? 그렇기도 하지만 아니기도 하다. '하얀 벽'의 정체와 그동안 '내'가 저질렀던 나쁜 짓들이 밝혀지면서 그것은 호러가 아니라 냉혹한 현실의 하나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더 심각한 건, '하얀 벽'이나 '나'의 사연들이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벌어지는 일들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누구라도 그것을 알기에 더 오싹해지는 것이고 그래서 더 두려워지는 것이리라.


표제작 '손톱이 자라날 때'는 어떤가. 소설 속의 교실은 살벌했다. 누군가는 집이 부자라서, 누군가는 힘이 세서 강자의 위치를 점한다. 반면에 누군가는 필연적으로 약자가 된다. 강자는, 아니 강자들은 패거리를 만들어 약자를 공격한다.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런 교실에서 '나'는 손톱을 기른다. 패거리에 들어가는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길고 긴 손톱으로 누군가를 할퀴는 것, 그것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생각을 보며 어이없어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단지 그뿐일까? 이 소설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이유는 뭘까? 약자가 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으로 그렸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꽤 상징적이다. '따' 당하지 않으려고 '따' 시키는 아이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지켜보는 어른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이러한 이야기가 소설의 것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 또한 도처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런 것일 테다.


<손톱이 자라날 때>는 으스스하다. 교실 곳곳에 숨겨진 살벌한 장면들을 보고 있으면 소름이 돋는다. 콩콩 귀신 이야기는 애교로 느껴질 정도다. 그런데 왜일까. 그 으스스한 기분이 눈앞을 부옇게 만드는 건 왜일까. 그 살벌한 곳에 내던져진 아이들 또한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무서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그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두루뭉술한 말들만 해줄 수밖에 없는 걸까? <손톱이 자라날 때>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하얀 벽이 다가오는 건 어른이 보기에도 무섭지만, 정말 무서운 것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답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손톱이 자라날 때

방미진 지음,
문학동네, 2010


#방미진 #청소년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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