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당선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키지 못해 미안한 마음 뿐"이라며 "김대중-노무현의 역사를 통해서 진보진영이 하나가 됐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남소연
- 그럴 수 없어 속이 많이 상했을 텐데 힘든 시기를 어떻게 이겨냈습니까. 당시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가족들에게도 많이 미안했을 것 같은데요."2003년 말 대선자금 수사 대상이 되고 감옥에 간 순간 참여정부에서 배역이 끝난 배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쉽지만 예전 주윤발 나오는 <영웅본색>처럼 영화 초반에 일찌감치 총 맞고 아웃되는 역이었죠.(웃음) 주윤발은 쌍둥이 동생이라도 있어 (2편에서) 다시 돌아왔지만 저는 쌍둥이 동생도 없고.(웃음) 5년 동안 조용히 지내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옥에서 '나는 참여정부의 공직에 나갈 가능성은 없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정리하고 나왔죠.
노 전 대통령이 2003년 2월 취임 이후 모든 참모들을 청와대에 모이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좌중을 둘러보시더니 '다들 좋지' 그러시면서 '여기까지 무사히 걸어 들어왔으니 나갈 때도 무사히 걸어 나가자'고 하셨습니다. 무사히 나가기 위해서는 주변에서 권력형 비리 문제 등으로 속 썩이지 말아야지요. 제가 거기에 일조하는 길은 나의 모든 배역은 끝났다라고 정리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출소 후 공백기를 가지면서 2005년에 가족들과 함께 외국 유학이라도 갈까 고민했습니다. 국내에 있으면 괜히 원하지 않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을 것 같았고. 그런데 돈이 있어야 가죠. 전세금 털어서 갔다와야하는데 이걸 털어 쓰면 나중에 어떻게 살지 걱정이 됐죠. 주위에서 도와주신다는 분들이 계셨는데 그런 도움 받으면 또 얼마나 (적대적 언론에) 괴롭힘을 당하겠어요. 그래서 최장집 교수께 간청해서 고려대아시아문제연구소에 연구원으로 들어가 공부했습니다. 그러다가 2005년 하반기부터 직장 구하러 다니는데 아무도 안받아주더군요."
-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당시 만났던 기업인들이 차라리 어려우면 도와주겠다, 하지만 취직은 안된다고 그랬습니다. 그 땐 정말 서운했습니다. 저도 아침이면 출근해서 일하고 싶은데. 그러다가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노 전 대통령 후원자)이 '안 소장 순진해서 취직하려 하는데 당신 받아줄 사람 아무도 없어' 그러면서 자기 회사에 와 있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거기 사외이사로 가 있었죠."
- <오마이TV> 생중계 시청자 중 한 분이 '안 당선자는 봉하마을 갔을 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는데 저는 안희정 생각하면 자꾸 미안하고 눈물이 났었다'고 합니다. 노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검찰 수사를 받으면서 괴로워할 때 측근들에게 '정치하지 말라'고 했지요. 정치를 하려고 했던 안 당선자는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노 전 대통령은 정치하는 평생 동안 정치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1994년 지방자치연구소 할 때도 부산에 있는 참모들까지 다 모아놓고 그만하자고 했습니다. 오히려 시민운동 하자고 했지요. (잠시 생각하다가) 왜냐면 정치를 하는 사람과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들 사이의 불신의 전선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기업이 소비자에게 물건을 속여판다는 인식이 계속 됐다면 기업이 지금 수준까지 발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정치는 그런 신뢰가 형성이 안됩니다. 그래서 정치하는 사람은 죽을 맛이고 바라보는 국민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지요. 그래서 노 전 대통령은 정치 일선에 서있으면서 정치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상처뿐인 영광 아닌가 그런 회의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도 정치 계속 하는 문제에 대해서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하지 말라'는 좋은 정치를 하라'는 역설이라고 생각합니다."
- 안 당선자는 참여정부평가포럼을 만들고 상임집행위원장 활동을 하면서 평가 작업들을 많이 했지요. 참여정부를 되돌아봤을 때 잘한 점 하나, 아쉬운 점 하나를 뽑는다면 뭐가 있을까요."한 정치인이 실패했다, 한 대통령이 실패했다고 할 때 어떤 기준으로 평가한 것인지 애매합니다. 저는 선출직 권력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게으름과 부도덕, 거짓말, 이를 통한 사적 이익의 추구라는 부패, 이런 문제만 극복했다면 의미 있는 정치지도자였다고 평가해주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상 첫 정권교체, 한반도 평화 무드 조성 이 두 가지, 노무현 전 대통령은 특권과 반칙의 질서를 일소했던 게 역사적 업적입니다. 돈을 벌건, 지위나 명예가 높아지건 출세하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특수한 권력을 갖기 위한 것, 나는 예외가 될 수 있다, 그건 아니더라도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돈이 많든 적든, 지위가 높든 낮든 누구도 억울한 일을 당해서는 안되는 것이죠. 특권과 반칙을 일소하는 것 이보다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노 전 대통령이 이를 위해 권력을 놓았다고 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헌법대로, 법치주의 위에 대통령 권력을 올려 놓은 것이죠. 그런데 법치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상식이 통해야 합니다. 힘 센 사람과 힘이 약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룰이 달라야 합니다."
"김대중-노무현의 실패? 시대적 한계 인식해야"- 그렇다면 아쉬운 점은요?"글쎄요. 세상의 어떤 현자나 위대한 스승이라도 시대적 조건에 제약을 받습니다. 아무리 솜씨 좋은 우리 어머니라도 냉장고에 재료가 없으면 요리를 못합니다. 대한민국 냉장고에 중국요리 재료가 없는데 중국요리가 먹고 싶다며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은 실력 없는 요리사라고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청와대에 있었던 정태인 박사가 청와대가 모피아에 둘러싸여있었고 비판하는데 그 안타까움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대체할 수 있는 경제적 지배 블록이 확립되지 않았던 조건을 이해해야합니다. 시대적 한계를 김대중-노무현의 한계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세계화 흐름에 대해서 그 누구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먹고 사는 배경은 전세계를 넘나드는데 일국 단위에서 복지·노동·교육 정책을 끌고 나가는 게 쉽지 않습니다. 노 전 대통령도 말했지만 어렵고 힘든 분들에게 실질적 돌파구를 못찾아 드렸지요. 사회적 양극화와 관련해서 무수한 과제들이 있습니다. 실업과 고용불안, 중소자영업자와 현대적 유통채널과의 갈등, 비정규직과 정규직 갈등 등 많은 대립이 있는데 이 문제는 현대 민주주의가 풀어야할 가장 큰 병입니다. 전 세계 모든 지도자들이 마치 외과 의사들이 암을 정복해야하는 것처럼 이 문제들 앞에 서있는 것이죠."
- 이명박 대통령이 임기 절반을 마쳤습니다. 이곳 '더좋은민주주의연구소'도 이 정부 출범 8개월째 됐을 때 '이대로는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다고 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와 비교해보면 대비되는 점이 있을 텐데요."대한민국에는 김대중-노무현의 민주주의 리더십이 있고 한나라당에 이어지고 있는 이승만-박정희 리더십이 있습니다. 박정희 리더십의 가장 핵심은 나를 믿고 따라오라는 것이죠. 또 안되면 되게하라는 것입니다. 박정희의 낡은 리더십이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구현되고 있습니다. 컴퓨터로 치자면 도스 운영체제가 윈도 기반의 인트라넷 주변기기와 부딪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리더십으로는 대한민국의 활력과 행복을 찾기 어렵습니다."
- 이번 선거에서 안 당선자와 함께 송영길(인천)·김두관(경남)·이광재(강원) 등 젊은 당선자가 배출되면서 야권의 차세대 리더가 등장했고 합니다. 40대가 광역자치단체를 책임지는 주역으로 등장했는데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나요."자꾸 의미를 부각시킬만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한국전쟁 시기에 대한민국을 지키고 산업화를 일군 세대가 80세 전후의 우리 부모님 세대, 물론 잘 모셔야지요.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일할 사람이 필요한데 40대인 우리들이 해야합니다. 그런 자연스런 흐름속에서 일할 나이가 됐고 기회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선거운동을 하면서 우리 아버지 연배 정도 되는 분들이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가시다가 제가 인사를 하니까 올해 몇 살이냐고 물으시더라고요. 마흔 일곱이라고 했더니 이구동성으로 남자로서 일하기 좋은 나이라면서 '열심히 혀' 그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