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행 노조위원장.
남소연
- 총파업 단식투쟁 때 어린이날 올린 트윗을 잊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가족들은?"중학교 3학년짜리 큰딸이 있는데 지독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다. 수년간 부모와 충돌하는 중이어서 지금 그에게 아빠의 상황을 얘기할 틈은 없다. 사춘기를 보내는 것만으로도 저 자신도 힘들고, 나도 힘들고. 그리고 자식들에게 내가 겪는 상황을 일일이 얘기하지는 않는다.
초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아빠 이제 백수 되는 거야?'라고 제 엄마에게 물었다고 한다. 백수가 뭔 줄 아느냐고 물었더니 안다고 했다는데, 뭐 그 정도다. 해고로 가장 충격을 받은 분들은 집안의 어른들이다.
어머니와 장모님, 두 분은 경찰조사와 해고에 대해 굉장히 두려운 상황으로 인식하고 계신 것 같다. 아내는 함께 의논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수준이다. 노조위원장 선거에 출마할 때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받아들이라 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해고됐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입장을 바꾸라, 이렇게 요구할 사람도 아니다. 아내가 제일 든든한 버팀목이다."
- 해고되면 생계는 어떻게 되는 건가."MBC 노동조합 규약에 조합 활동으로 피해를 본 조합원에 대한 구제규정이 있어서 생활하는 데는 큰 문제 없다. 위원장 임기는 내년 2월까지인데, 해고는 됐지만 유고상태는 아니니까 끝까지 해야 한다. 후임 집행부의 짐이 무겁더라도 옮겨주고 가려고 한다."
- MBC 역사상 14년 만에 해직 언론인이 됐다. 지난 1996년 강성구 사장 퇴진 운동을 주도했던 최문순 당시 노조위원장(현 민주당 의원, 전 MBC 사장) 이후 첫 해직이다."최문순 위원장은 1년 만에 복직됐다. 그러나 나는 언제 복직될지 잘 모르겠다. 앞날을 예단할 수 없으니까. 그러나 늦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MBC 노동조합이 한 일이 매우 상식적이고 크게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조만간 바로잡힐 것으로 예상한다."
- 이 위원장 말고도 집행부 17명이 정직이나 감봉 징계를 받았다. 재심에서 걸러지기는 했지만 사측은 당초 41명을 징계했다. 파업에 대한 보복성 무더기 징계다. "지역MBC까지 합치면 전체 106명이 징계위에 회부됐다. 서울은 징계가 끝났지만 지역지부는 지금도 징계가 진행 중이다. 다소 변화는 있을 수 있지만 최종 100명이 넘는 수가 파업투쟁으로 징계위에 회부됐다. MBC 역사상 최대 규모다.
최문순 전 위원장이 해고됐을 때 24일간 파업했었다. 당시엔 최문순 위원장만 해고됐었다. 위원장에게만 모든 정치적 책임을 물었고, 다른 조합간부들에 대해서는 징계가 없었다. 김재철 사장의 징계는 상당히 유혈적이다.
MBC 역사에 없었던 큰 폭의 고강도 징계였다. 조합간부들이 그렇게 큰 죄를 지었나? 근본적인 책임은 자신에게 있는데도 인사권과 징계권이 있다는 이유로 마구 휘둘렀다. 도덕적 우위에 있는 사람이 잘잘못을 따져서 징계를 내릴 수는 있지만, 권위를 상실한 경영진이 내린 징계, 누가 인정하겠나."
저녁밥을 먹다가 머리를 빡빡 밀고 나타난 사내들- 항의투쟁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나."농성도 하고, 집행부가 삭발하기도 했다. 삼삼오오 울분을 참지 못하는 조합원들이 개별적으로 머리 깎고 다닌다. 회사를 상대로 타격할 수는 없지만 양심상 지금의 상황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삭발한 조합간부나 조합원들이 있다.
MBC에서 삭발하는 예가 없다. 파업, 투쟁 그리고 해고가 돼도 삭발한 전례가 없다. 그만큼 지금 김재철 사장의 행태에 조합원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는 게다. 자신들이 해고된 것은 아니지만 그 이상의 분노를 느끼고 있다고 본다."
- 누가 먼저 머리를 깎았나."연보흠 홍보국장, 이세훈 교섭쟁의국장, 서점용 영상미술부문 부위원장 셋이다. 저녁밥을 먹다가 한 시간만 나갔다 온다고 하더니 갑자기 머리를 밀고 왔다. 그들 모두 96사번 동기들이다.
몇 사람이 하니 그 다음 도미노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결국 집행부들이 다 깎았다. 여성 중에는 <공룡의 땅>을 만들었던 이동희 피디가 비전임 여성국장인데 '깎았다', 빡빡.
처음에는 사람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일 거라고 생각했다. 방송국에서 머리 깎고 다니면 좀 그렇지 않나. 그런데 의외였다. '잊지 말자' 뭐 이런 환기효과랄까. 삭발한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적당히 넘어가지 말자'는 다짐을 하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나는 지금 잘 살고 있나 이런 생각도 하게 되는 것 같고."
- 지난 5월 14일 노조는 파업 일시중단을 선언했다. 39일간 파업하고 40일 만의 현업복귀였다. 이때 나흘간 연속총회를 했는데 논란의 핵심은 무엇이었나."파업투쟁의 지속여부였다. 집행부는 천안함, 월드컵 등 정세요인, 그리고 김재철-황희만 두 인물은 노조가 아무리 파업을 해도 물러나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물론 파업을 더 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 판단으로는 그동안 충실히 파업투쟁을 했고, 내부적으로 김재철과 황희만을 인정하지 않을 만큼의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다.
파업투쟁을 더 하는 것으로 상황의 변화는 없다, 김재철을 물리적으로 끌어내는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이 상황은 교착상태라고 봤다. 김재철은 정치적으로 사망했다고 규정하고 언론노동자로서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현장투쟁을 병행하자고 결정했다. 그 결정에 대해 (일부) 조합원들이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였다.
총파업투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불같은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조합원들은 집행부의 입장에 동의했다. 힘의 논리로 조직적인 결정을 강요하고 진행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보다는 충분히 얘기하는 방식으로 풀었다. 조합은 비상시국에 무언가 결정해야 하지만 일방통행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흘간의 총회를 좋게 봐준 분들이 많다.
MBC 역사에서 전무후무했던 총회. 선배들도 언론노동운동의 이정표가 될 것이라고 얘기했다. 이것은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