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가부장 - 알맹이 없는 동굴 속 황제

전인권의 새로운 정치학 <남자의 탄생>

등록 2010.06.23 09:58수정 2010.06.2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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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탄생 표지 ⓒ 알라딘


<남자의 탄생>은 정치학자가 쓴 책이지만 그 속에는 정치사상가들의 이름이 등장하거나 어려운 정치학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 책을 읽고 나면 새로운 정치이론을 알게 되지는 않는다. 대신 우리들 아버지, 오빠, 남동생, 남자친구, 남편의 속내가 보이고 더 나아가 한국의 여성, 특히 어머니들의 속내가 보인다. 마치 페미니스트의 글 같기도 하고 정신분석가의 글 같아 보이기도 하다. 정치학자가 왜 이런 글을 썼을까? 의아한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다 읽고 나면 우리나라 정치개혁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고 요긴한 작업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 면에서 새로운 정치학이라면 새로운 정치학이라 하겠다.

그는 한국의 정치현실의 뿌리를 규명하기 위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자신의 성장과정을 추적한다. 정치현실을 개개인의 의식의 바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하는 제멋대로의 상상이긴 하지만 추측해 보건대 그가 자기 성장과정을 분석한 데는 마땅히 분석하기 쉬운 다른 모델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보게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인생을 분석대상으로 내놓는 일을 주저하지 않을 만큼 자유로운 이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남자들의 이야기 아닌가! 여자들이 아니라 남자들이 자기 인생살이를 미주알 고주알 털어놓는 것을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늘 근엄한 얼굴로 점잖은 남자 체면을 지키고 있어야 할 남성들이 어설프고 유치하며 속속들이 드러날 자기 성장과정에 솔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만큼이나 어려워 보인다면 과장일까? 우리 남편은 말이 없어요! 우리 아버지는 말씀이 없어요! 한두 가정의 사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을 읽어보면 왜 남자들이 그렇게 말이 없는 존재들로 '되어가는지'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면에서 정치학자 전인권은 자기 이야기를 생짜로 드러내 놓은 흔치 않은 남성이다. 그가 말했듯이 한국 정치현실의 변화와 성장을 위해 뿌리의 처방과 새로운 대안을 모색했던 학자로서 솔선수범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브라보! 부디 더 많은 남성들이 억눌렸던 생생한 자기 이야기를 전인권처럼 해방시킬 날이 오기를!

한국 남성은 동굴 속 황제

전인권의 표현을 빌려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한국 남자들은 동굴 속 황제이다. 재미있는 표현이다. 실제 세계에서 호령하는 황제가 아니라 갑갑한 작은 세계, 동굴 속 황제라니. 황제라는 표현은 나 역시 어려서부터 내 아버지를 보면서 별명처럼 혼자 갖다 붙이던 표현이었던지라 남성 스스로 황제라고 고백하는 설명에 쉽게 공감이 가고 그의 이야기에 호감이 간다. 나는 우리 아버지만 그런 인물인 줄 알았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타고나신 줄 알았다. 그런데 저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한두 남자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렇게 타고나지도 않는다. 동굴 속 황제는 '길러진다'. 처음부터 황제로 태어났다기보다 동굴 속 황제로 '만들어진다'.

동굴 속 황제로 성장하는 과정은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대신하는 아들, 어머니에게 가장 사랑 받는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과 관련이 깊다. 물론 여기서 딸들, 그러니까 저자의 여자 형제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위한 경쟁자로서 배제되어 있다. 저자의 의식의 바닥에서 여자형제는 실질적인 형제가 아니다! 경쟁은 남자들끼리만 한다! 


이런 사고방식을 나 역시 아주 잘 알고 있다. 우리 아버지도 언젠가 자기 형제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단 하나의 우리 아우'라며 작은 아버지만 소개를 하신 적이 있다. 분명히 '단 하나의 우리 아우'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나머지 네 명의 고모들은 아예 소개할 생각조차 안 하셨다. 나로서는 매우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고모들은 어떤 존재였던 걸까. 여자 형제를 기본적인 형제 개념과 다르게 인식한다는 사실은 남성들에게 대체 여성이란 어떤 존재감을 지닌 존재들인지 새삼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소장학자 전인권의 머릿속 역시 우리 아버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에서 연세 많은 우리 아버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은 금세 확인이 되었다. 그것은 동굴 속 황제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여성들은 그들에게 동등하게 관계 맺는 사람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아니 책을 읽다보면 남성들은 여성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관계 맺어본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이 출간된 후 많은 여성주의자들에게 그 점을 지적 받았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야 저자 역시 자신이 여자 형제들에게 갖는 태도를 깨달았다고 한다. 그러니 이 책을 읽으면 한국 남자가 아주 잘 보인다! 그리고 한국 어머니도 한국의 딸들도. 그러나 '남자의 탄생'에서는 여성이 그렇듯이 남성들도 남성으로 '되어가는' 과정이 있음을 눈여겨보게 한다.

서양과 다른 한국의 모자 관계

아들이 동굴 속 황제로 성장해 가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인물은 어머니이다. 아버지는 되도록 기여하지 않는 방향으로 기여를 하는 특별한 역할을 맡는다. 아들을 양육해서 아버지를 다시 재생산해 내는 가장 긴밀한 역할이 어머니에게 지워져 있다는 점이 재미나다. 이 점이 바로 서양과 우리 현실이 갈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서양 어머니들은 이렇게 막강하게 자녀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듯하니 말이다.

한국의 어머니들에게 아들이란 실제 애정을 주고받는 실질적인 남편이다. 남편과는 구별된 공간을 쓰고 사랑의 표현을 자제하면서 자못 엄숙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아들과는 스스럼없는 애정표현과 스킨십마저 자유자재로 나눈다. 어머니는 아침마다 아버지와 뽀뽀하지는 않아도 어린 저자와는 매일 아침 뽀뽀를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자기 처지도 남편에게보다 아들에게 더 잘, 더 많이 털어놓는다. 그러다보니 어머니와 아들은 함께 집안의 문제를 해결해 가는 동료가 되기까지 한다. 아버지보다 더 믿고 사랑해주는 자기의 첫사랑 엄마를 위해서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 역할을 대신해 나선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동서양 잠자리 질서는 참으로 상징적이다.

한국에서 어린 아이들은 부모 사이에서 끼어 자곤 한다. 저자의 경우에는 아버지 공간과 구별되는 어머니 공간에서 밤마다 어머니 옆에서 잠들곤 했다. 우리 문화에선 흔한 일이다. 그러나 서양은 잘 알고 있듯이 간난아기 시절이라 하더라도 자기 방에서 부부와 따로 잠드는 게 보통이다. 아이와 부부의 침실은 분명히 구별되어 있고 그 질서는 공고하다. 그래서 서양 소설에서는 아버지 방으로 떠나는 엄마를 우울하게 쳐다보는 아들의 고백이 적지 않다. 아들은 아들이고 남편은 남편이고 분명하게 구별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모자 간의 관계 속에서 주고받을 상호작용의 내용과 방식의 차이로 이어진다.  

남성들이 어린 시절부터 엄마의 첫사랑이자 동료로 역할한다고 해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어머니는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아들의 첫사랑이거나 동료로 역할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가족 모두를 포함하며 집안 살림을 떠맡은 사람으로 아들의 첫사랑이고 동료일 뿐이다. 어머니 이전의 한 개인으로서 독자적인 자기 욕구와 삶은 비어 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한국의 가정에서는 어머니의 힘이 막강하다. 개별자로서 자기 삶을 포기해 버렸으니 보상처럼 어머니에게는 힘이 붙는다. 가족 모두를 위해 사는 어머니에게 감히 누가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려서부터 여성은 한 사람의 독자적인 개인으로서 남자들에게 비치지 않는다. 여성인 어머니는 아들인 나를 위해서, 집안을 위해서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전사일 뿐이다. 남성들은 어려서부터 여성과 독자적인 개인으로 관계 맺는 경험이 없는 것이다. 한국은 민주공화국이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며 대화하고 일하는 여성들에 대해 남성들이 느끼는 어색함을 이해할 만하다. 어딘지 어색한 남녀평등 민주주의 사회인 것이다.

베일을 벗은 한국의 가부장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어머니 공간과 아버지 공간은 다르다. 지저분하지만 편안하고 안락한 어머니 공간에 비해서 깔끔하게 질서 잡힌 근엄한 아버지 공간은 불편하긴 하지만 아들에게는 언젠가는 내가 주인이 되어야 할 공간이다. 그러나 그렇게 근엄하게 질서 잡은 아버지의 공간을 유지하는 데는 실질적으로 어머니의 기여가 막대하다. 매일 청소하며 질서를 잡아주는 분이 어머니이고 근엄한 공간을 어려서부터 유별하도록 아이들을 단도리하는 것도 어머니이다. 아버지 스스로 하지는 않는다. 아버지는 아내가 마련해 준 질서 집한 공간에서 자기 일에만 몰두하면 된다. 바로 여기에서 한국의 아버지는 대개가 신비주의 전략으로 유지되는 아버지란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아내와 자식들과 별로 말도 섞지 않는 아버지는 근엄하고 질서 잡힌 자리에서 매우 신비롭게 혼자서 자기 일에만 몰두한다. 한국사회에서 신화화된 허울에 가까운 가부장의 실체가 바로 이것이다.

아버지는 자기 일에만 몰두하지만 가정 안에서 외롭고 부자유스러운 자리에 있다. 부부가 공모해서 성스러운 모성의 어머니, 근엄한 질서의 아버지 신화를 만들어 가면서 아버지에게 할당한 역할은 스포트라이트를 혼자 받지만 그렇기 때문에 쉽게 베일을 벗을 수 없는 부자유스러운 아버지이다. 말이 많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신비주의 전략에 해가 된다. 근엄한 아버지 상을 자칫 깨버릴 수도 있다. 가끔 술을 마시거나 친구들과 어울릴 때 아이가 되는 아버지 모습에 놀라면서도 즐거워하는 아들의 관찰은 그럴 수밖에 없다. 아버지의 실체가 드문드문 들통나는 순간이지 않은가.

이렇게 성취로만 아버지의 역할이 비좁게 한정되는 것은 한국에서 남성 역시 여성 못지 않게 개인으로 살아가기 힘들게 하는 요인이 아닐까. 자기 삶 없이 다른 가족들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어머니의 희생이 무리하고 부자연스럽듯이 근엄하게 점잖은 체면만을 유지해야 하는 아버지 역시 무리하며 부자연스럽게 외로워야 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절제되어야 하고 절제하다 못해 억압이 동원되기도 할 것이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눈물의 씨를 말려버리자! 맘껏 울지도 못하는 이들만큼 가여운 이들도 없다. 저자는 나이든 부모의 처지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어머니는 자식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며 여전한 역할을 유지하고 잘 지내시지만 퇴직 후 집으로 돌아오신 아버지는 그렇지가 못하다.

실제로 강력한 힘을 지니지 못했음에도 신비롭게 힘을 부여하는 한국의 가부장 질서는 한국 민주주의의 실체와 닿아 있다. 독재자에게 힘과 권위를 불어넣으면서 자신은 힘이 없다고 믿는 '시민'의 자화상은 바로 우리들 모습일지 모른다. 민주주의는 개별자들의 대화와 타협과 연대가 필수적이지만 신비주의로 유지된 서열화 질서에 익숙한 이들이 동등하게 자기 입장을 가지고 대화하고 타협하고 연대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개개인 마음의 현실이 정치현실과 유착되어 있는 점을 밝힌 것만으로도 충분히 일독할 만한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정신건강 계간지 <니> 2010년 여름호 (19호) '니와 사는 남자들'에도 수록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정신건강 계간지 <니> 2010년 여름호 (19호) '니와 사는 남자들'에도 수록되었습니다.

남자의 탄생 - 한 아이의 유년기를 통해 보는 한국 남자의 정체성 형성 과정

전인권 지음,
푸른숲, 2003


#새로운 정치학 #남자의 탄생 #한국 가부장 #전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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