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덕'의 퇴화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는 대학생

등록 2010.06.24 08:54수정 2010.06.24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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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おたく) : '당신', '댁'이라는 뜻을 지닌 이인칭 대명사의 일본어로 마니아보다 더욱 심취하여 집착하는 사람을 뜻함.


이 오타쿠라는 단어는 좀 더 한국어처럼 진화하여 '오덕후'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흔히들 걸그룹이나 특정 만화책이나 게임 등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오덕후라 부른다.

요즈음에는 음식이나 사상 등에 몰두하는 사람들도 통칭해 오덕후라 일컫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지인 중 맥도널드의 런치 세트 메뉴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를 가르켜 '맥덕후'라 한다. 덧붙여 젊은층들의 말줄이기는 여기서도 나타난다. '덕후'를 '덕'으로 줄여 '맥덕' '오덕' 이런 식으로 말하고 다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축덕'은 무엇인가. '축구 오덕후'의 줄임말이다. '피파'나 'Football Manager' 등의 축구 게임을 즐기고 우리 나라 K-리그 경기는 보지 않지만 밤을 새서라고 EPL이나 프리메라리가 등 외국 프로축구 경기를 시청하는 사람(주로 남자)들을 말한다. 이 축덕들은 요새 월드컵 시즌을 만나 물만난 고기처럼 활동하고 다닌다.

이 글을 쓰는 본인은 여자다. 허나 24년 사는 동안 '넌 여자가 아니야'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고 살아 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성격이나 행동 탓도 있었지만 보통 여자 아이들이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야를 좋아했던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 중 하나가 축구였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1998년 열린 프랑스 월드컵은 단발머리 초등학생에게 축구의 묘미를 가르쳐주었다. 방과 후 집으로 오자마자 책가방을 던져놓고 텔레비전을 켜서 월드컵을 시청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나이에도 잉글랜드의 데이비드 베컴(35, 인터 밀란)은 너무나 섹시했다.


그리고 4년 후 열린 2002 한-일 월드컵은 대단했고, 우리들은 '월드컵 세대'라 불리게 되었다. 거리응원에 나가지 않는 친구들은 아무도 없었고 본인은 월드컵에 출전한 거의 모든 선수들과 감독들의 이름을 다 외우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축덕'의 경지에 한 발짝씩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열린 유로 2004는 본인의 '축덕' 지수를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했다. 새벽 5시까지 모든 경기를 다 보고 1시간 정도만 자고 등교하는 생활이 2주 정도 지속되었다. 유로는 유럽 국가들끼리 겨루는 경기가 월드컵에 비해서는 우리 나라 사람들과 언론의 관심이 아무래도 적을 수 밖에 없다. 당시 같은 반 학생들 중 아무도 유로 경기를 시청하는 사람은 없었다. 유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친구들이 대다수였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은 대학 새내기였던 본인에게는 또다른 해방구가 되었다. 입시 스트레스를 푼다는 명목으로 거리 응원에 열심히 임했다. 당시 한국 국가대표팀의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지만 '축덕' 지수는 여전했다.

그리고 올해의 남아공. 이 때까지 세 번 펼쳐진 한국팀의 경기 때 단 한 번도 거리 응원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르헨티나 전을 제외하고는 텔레비전으로도 경기 시청을 하지 않았다. 매국노라 욕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대학교 4학년 2학기라는 상황은 10년 정도를 이어온 '축덕'의 길조차도 막아버렸다. 비슷한 상황임에도 열심히 거리 응원을 즐기신 분들도 많으리라. 하지만 개인이 느끼는 삶의 무게란 언제나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스 전이 열렸던 지난 12일, 동생에게 빨간색 티셔츠를 사주고 상암동 경기장으로 보내놓고는 모니터 앞에 앉아 기말 시험 공부를 했다. 옆방과 집 근처 술집 등에서 들리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으면서도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다. '축덕'의 퇴화와 취업준비생이 느끼는 '짐'은 비례하는 듯하다.
#축덕 #대학생 #취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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