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김유석 분).
MBC
장 희빈은 숙종 15년(1689)에 인현왕후를 폐비로 만든 데 이어 이듬해인 숙종 16년(1690)에 중전 자리를 차지했다. 그 후 몇 년간 장 희빈뿐만 아니라 장희재의 인생도 그야말로 탄탄대로 그 자체였다.
장희재는 누이동생의 후광으로 경찰청장인 포도대장, 경기지역 군사령관인 총융사, 서울특별시 부시장인 한성부 우윤(이상 종2품 차관급) 등의 관직을 획득했다. 명목상은 차관급이었지만, 경찰권과 군권을 장악했다는 점에서 장희재의 실제 위상은 그보다 훨씬 더 높았다.
그런데 그러던 장희재가 숙종 19년(1693)에 포도대장 신분으로 전격 체포되었다가 곧 석방되는 해프닝이 발생했다. 그런 뒤에 폐비 복위운동이 가속화되면서 이듬해인 숙종 20년(1694)에 장 희빈이 중전에서 후궁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중전 자리에 복귀하는 한편 남인세력이 정권을 잃고 서인세력이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므로 장희재의 체포는 비단 장희재뿐만 아니라 장 희빈의 신상과 관련하여 더 큰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그것은 장 희빈에 대한 숙종의 애정전선에 먹구름이 끼었음을 반영하는 동시에 장 희빈의 앞날이 심상치 않게 될 것임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왕 측근들을 불법사찰한 포도대장 장희재
그렇다면, 포도대장 장희재는 어떤 이유 때문에 체포된 것일까? 숙종 19년(1693) 3월 24일자 <승정원일기>에서 그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국왕 비서실인 승정원의 근무일지인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그 전날인 3월 23일(음력) 오후에 포도청 군관 이지훈이 군관 3명과 군사 4명을 이끌고 승정원 당하관(堂下官)들이 모인 장소를 불법 사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은 병조(국방부) 하급직원인 결속리(結束吏)의 안내를 받아 그곳에 잠입한 뒤에 종이창을 찢고 방안을 몰래 엿보는 등의 행위를 했다고 한다. 전통 혼례식 뒤에 마을 사람들이 신혼부부의 방문을 몰래 엿보듯이 포도청 군관들도 그런 식으로 정부기관을 불법 사찰한 것이다.
국왕의 비서인 승지들은 모두 당상관 즉 정3품 상(上) 이상이었다. 따라서 정3품 하(下) 이하인 승정원 당하관들은 승지 아래의 직원들로서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비서관 밑의 행정관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승지건 아니건 간에 국왕의 측근들을 불법 사찰했으니, 이것은 당연히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포도청 직원들은 "예문관(공문서 제작기관)의 청지기를 몰래 체포하기 위해 그런 일을 했다"고 말했지만, 그것이 불법 사찰의 진짜 의도였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중요한 것은 포도청 직원들이 국왕의 측근들을 불법 사찰했다는 사실이다. 포도대장 장희재가 이미 적정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누이동생의 권세를 믿은 장희재가 권력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임금의 영역까지 건드리고 만 것이다. 누구보다도 권력유지에 민감한 숙종을 정면으로 자극할 만한 사건이었다.
숙종이 신속하게 장희재 수사를 허락한 이유그런데 승정원은 이 사건을 숙종에게 곧바로 보고하지 않았다. 사건 당일에 보고하지 않고 그 다음날 보고한 것이다. 승정원에서 늑장 보고를 한 이유는 사료에 정확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이는 이 사건이 국왕의 처남인 포도대장 장희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못 보고했다가는 국왕이나 장 희빈 혹은 장희재로부터 반격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승정원 직원들이 불법 사찰을 당한 사건을 그냥 덮어둘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덮어 두었다가 더 큰 벌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턱대고 보고할 수도, 그렇다고 마냥 덮어둘 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승정원은 사건 발생 하루 뒤인 3월 24일 나름대로 승부수를 던졌다. 임금에게 사건을 보고하면서 장희재에 대한 수사를 건의한 것이다.
"이것은 전에 없던 변고입니다. 포도대장은 심문하시고 군관과 결속리는 담당 관청에서 구금하고 형벌을 부과하도록 해주실 것을 청합니다."승지들은 장희재에 대한 수사를 건의하면서 내심 무척 긴장했을 것이다. 국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숙종의 반응은 매우 신속했다. 장희재에 대한 수사를 재가한 것이다.
승정원의 건의가 쉽게 수용되는 모습을 지켜본 사간원(정치의 잘잘못을 가리는 기관)에서는 며칠 뒤인 4월 1일에 한층 더 강력한 어조로 숙종에게 건의를 올렸다. "포도대장을 잡아다가 심문하고 처단하라고 명령해주십시오." 이번에도 숙종은 신속하게 건의를 수용했다. 이로 인해 장희재는 수사기관에 체포되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은 결국 장희재가 하루 만에 석방되고 포도대장에서 해임되는 동시에 여타 관련자들만 중형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됐지만, 이 속에는 장 희빈·장희재를 포함해서 남인세력 전체에게 보내는 숙종의 경고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권력을 남용하고 국왕의 권위에 도전하면 장희재 체포 같은 사건이 또 발생할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동시에 이것은 장 희빈에 대한 숙종의 애정이 예전 같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장 희빈과 남인 몰락 신호탄 된 '불법사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