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팔트 길이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한 무더운 날이었다. 군산의 근대문화유산을 찾아 의미 있는 길을 떠났지만 더위에 온몸을 타고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맥이 빠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걷고 걷기를 반복하다보니 어느새 땀은 소금으로 변해 있었다.
어디 시원한 그늘 한 자락 없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 거리는데 아주 번듯한 옛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옛 군산세관 건물이었다. 처음 보는 건물이었지만 왠지 모를 친숙함이 낯섦 속에 있었다.
세관 출입구는 잠겨 있었다. 들어갈 방도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건물 벽 구석에 붙어 있는 인터폰이 눈에 들어왔다. 수화기를 들고 있으니 얼마 뒤에 해설사가 나타났다. 해설이 필요하시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해설은 군산세관의 역사부터 시작되었다.
군산세관은 1908년 6월에 대한제국의 예산 8만 6천원으로 지어진 유럽 양식의 근대문화유산건물이다. 1899년에 설치된 군산해관이 1907년 세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1908년부터 1993년까지 약 85년간 사용했던 건물이다. 1908년에 준공된 이 건물은 탁지부 건축소에서 이름 모를 독일인이 설계한 것으로 벨기에에서 수입된 붉은 벽돌을 사용하여 지어졌다고 한다.
세관 내에서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세관장실이다. 한쪽 구석에는 시대별로 제복들이 전시되어 있다. 세관 직원들이 제복을 입는 이유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40여 명이 근무했던 세관 내부는 목조로 되어 있다. 내부 기둥에는 벽난로의 흔적이 있다. 건물 어디를 봐도 냉난방을 한 흔적은 없고 벽난로가 유일하다.
정면 중앙의 출입구는 화강석으로 마감하였다. 바깥벽은 붉은 벽돌을 쌓았다. 특이한 것은 뾰족한 지붕을 얹은 것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안정되고 무게감 있는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정문을 들어오면 사무실이다. 사무실의 창턱은 매우 높다. 내부가 잘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조선인 민원인들은 직원들에게 고개를 올려다보고 민원을 해결해야 하는 다소 권위적인 구조로 되어 있다. 경비원도 늘 2~3명 상주했으며 문제가 발생하면 언제든지 민원인들을 끌어내었다고 한다. 출입 시에는 몸수색까지 했을 정도라 하니 그 살벌했던 분위기를 알 수 있겠다.
건물의 효율성을 위해 복도가 한쪽에만 설치되어 있고 내부공간은 거의 대칭으로 배열되어 있다. 천장의 조명 등은 지금은 수수해보이지만 화려한 옛 흔적이 남아 있다. 대한제국 시기 이곳에서는 밤에 각종 행사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이 몰래 구경하다 붙잡혀 뭇매를 맞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내에는 군산항 100년 사진자료가 전시 중에 있었다. 옛 사진을 통해 개항 직후와 일제시대 군산의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었다. 군산세관의 옛 사진도 인상적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망루 2개동이 보였다. 망루는 사무실과 선박입출항을 감시를 위해 지어졌다. 옛 군산세관 옆에 있는 지금의 청사를 지으면서 망루는 철거되었다고 한다.
옛 군산세관은 일제 수탈의 창구였다. 해방까지 주로 호남과 충청지역의 쌀 곡식 등을 일제가 수탈하였던 창구로 이용되었다. 옛 사진을 보면 세관 앞에 산더미처럼 쌓인 쌀가마를 볼 수 있다.
현재 이 건물은 호남관세전시관으로 개편 확장되었다. 내부에는 옛 군산항 및 주변 건물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들뿐만 아니라 세관 역사에 관한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또한 가짜 상품과 원산지 위반 사례 등을 전시하고 있어 관세행정의 일면도 엿볼 수 있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건물은 유럽 중세 건축 양식의 건물이다. 이러한 양식은 우리나라에 단 세 곳만 남아 있다.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 그리고 이곳 옛 군산세관 건물이 그것이다. 옛 군산세관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94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87호로 지정되었다.
이 근대유산도 한때 철거될 위기에 처했으나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재임하였던 61대 방길남 세관장에 의해 보존되었다. 당시 새로운 청사를 짓기 위하여 헐어버릴 것인지 아니면 역사의 가치를 지닌 건물로서 후대를 위하여 남겨둘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팽팽하였다. 그러나 당시 방길남 세관장이 군산세관의 얼이 담겨 있는 이 건물을 역사의 한 부분으로 남겨놓아야 한다고 강하게 설득하여 건물이 헐리지 않고 현존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일제의 잔재 청산이라는 명목 아래 서울 중앙청을 비롯하여 일제시대의 건물들이 하나둘 사라지던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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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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