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과 맨발

맨발의 키스

등록 2010.07.16 08:20수정 2010.07.16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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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에 새로 산 하이힐 몇 개가 신발장에서 나오지 못하고 한여름까지 왔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부터 굽이 높은 신발보다는 굽이 낮은 신발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한 아이를 안고, 또 한 아이의 손을 붙들고 기저귀 가방, 책가방, 도시락 가방, 손가방, 그렇게 길게 줄 서 있는 가방들과 유모차 등을 챙겨 다니는데 굽이 높은 신발은 절대로 어울리지 않지요.

 

그렇게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을 했던 지난 15년 동안 저의 발은 낮은 굽에 익숙해져 하이힐은 천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2, 3년 전부터 꼭 정장을 해야 할 경우 하이힐을 다시 신었는데 그 느낌이 마치 다시 처녀 시절로 돌아간 듯 매우 산뜻했습니다. 수그러들었던 하이힐 열기가 되살아나던 1980년대에 대학생활과 직장생활을 했으니 저도 청바지에 하이힐 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리하여 올 봄에 모처럼 하이힐 두 개를 구입했는데 교통사고를 당해 허리를 다쳐 한 번 신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조금 상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수개월 동안 치료를 받으면서도 이전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더딥니다. 지금도 치료 중이지만 사회생활 하는 사람이 늘 평평한 샌들과 운동화만 신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라 꼭 신어야 할 때 중간 굽의 신발을 두어 시간만 신어도 좋아지던 허리에 금방 무리가 옴을 느낍니다.

 

하이힐, 특히 여성의 그것은 사회학적, 건강학적, 여성학적으로 많은 논쟁거리를 제공했습니다. 하이힐을 신으면 걸음걸이를 단정하게 만들고 종아리 근육을 탄탄하게 하고 발과 다리와 몸매를 날씬하게 보이게 한다는 긍정적인 관점이 있는가 하면 하이힐은 발과 복숭아 뼈의 모양을 흉하게 만들고 보폭에 제한을 주며 뛸 수 없게 하고 무릎에 부담을 주고 여성을 무기력하게 하고 성적인 대상으로 전락시킨다는 관점도 있습니다.

 

두 가지 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이힐을 신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높은 신발을 신으면 삶의 질도 높아지기 때문일까요? 신발이 귀했던 고대사회에서 신발은 특히 굽이 있는 신발은 사람들의 신분을 나타냈습니다. 굽이 높은 신발을 신을수록 부유한 귀족층이었으니까요.

 

지금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발을 신발에 맞추려 하지 않고 발에 신발을 맞추는 시대입니다. 굽이 낮고 발 모양새를 해치지 않는 자연스러운 형상과 부드러운 소재의 신발들을 선호하고 비싼 가격에 팔립니다. 꼭 나이가 들어서만은 아니겠으나 저도 그런 신발이 좋습니다.

 

헌데도 가끔 하이힐을 집어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타인에게 어떻게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허리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그 하이힐이 잠시 동안이라도 몸을 쭉 펴서 곧게 만들어주는 것 같은 그 느낌, 덩달아 가슴도 활짝 펴고 서두름 없이 맵씨 있게 걸어야 할 것 같은 그 느낌. 더 높은 곳에 이르도록 그리고 더 멀리 볼 수 있도록 누군가 밑에서 척 받쳐주는 것 같은 그 느낌이 좋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도 한동안은 다시 찾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좋은 느낌을 포기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라도 자연과 생활의 느낌을 맨살로 만끽할 수 있는 발이 있으니 괜찮습니다. 맨발. 신발 속에 갇힌 사회와 경제, 그리고 여성의 발을 해방시키는 맨발. 신발이 가져다 주는 여러가지 편리함이 있지만 때로 맨발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요. 오늘은 오래 전에 썼던 저의 졸시 하나를 덧붙입니다.

 

맨발이고 싶을 때가 있었어

더러운 것 찌르는 것 피할 생각 접어두고

먼 길 나서 어디엔가 닿을 욕심 치워놓고

 

집 앞이었어

메일박스를 열었다 닫아 두고 오는데

발바닥에 묻은 먼지는 털 것도 없었어

뜨끈뜨끈한 청구서와 광고지들 속에

시멘트 바닥에 닿았던 그늘이 시원했어

 

잔디밭이었지 두 번째 맨발

아무도 없는 시간을 골라

이왕이면 햇살이 이슬에 눈맞추는 순간

신발을 벗고 섰는데

맨발의 키스

촉촉한 가시들의 부드러운 꺾임

꼿꼿하게 고개 들던 우울의 파편

여린 풀들에게 순순히 내어주던 그 날

 

다음엔 물이었고 그 다음엔 흙이었어

자박거리는 빗물에 찰랑거리다

맨발이 흙 속에 집을 찾는데

3백 년 넘게 살았다는 고목이 생각났어

흙 속에 맨발을 묻고 3백 년을 살았던 그 나무

이랬던 날 있었을까

이렇게 흙이 발이고 발이 흙이었던 날 있었을까

좋아서 밟고 또 밟았어

흙이 발바닥 지문을 지우고

흙이 발가락 사이를 메우더니

빗물을 타고 영혼에 이르는 길을 내더라

그 때 무슨 노래를 불렀는지는 기억에 없어

더 이상 아무도 없는 시간을 고를 이유가 없다는 것뿐

 

이제는 칼이고 다음엔 불이고 싶어

맨발에 칼이 들면 눈길을 부르겠어

맨발에 불이 오면 뼈 속으로 들이겠어

더러운 것 찌르는 것 피할 생각 접어 두고

먼 길 나서 어디엔가 닿을 욕심 치워 놓고

 

<장성희, 맨발의 키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중앙일보 애틀랜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0.07.16 08:20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중앙일보 애틀랜타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하이힐 #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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