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수첩'에는 무엇이 담겼나

영포게이트, 민주당이 '숨고르기'에 들어간 까닭

등록 2010.07.19 15:06수정 2010.07.19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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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KB한마음 대표 김종익(56)씨에 대한 총리실의 불법 민간인 사찰로 시작된 이른바 '영포게이트' 파문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시작은 사인(私人)에 대한 공권력의 부당한 인권 침해였지만, 지금 이 사건은 최고 권력자와 가까운 특정 세력의 전방위적인 국기문란, 국정 농단 사건으로 커졌다. 야당과 언론 등을 통해 흘러나온 의혹을 보면, 불법 민간인 사찰은 '영포 라인'을 몸통으로 한 큰 나무의 한 가지에 맺힌 '독과(毒果)'일 뿐이었다.

 

이 나무는 수많은 가지에 다른 독과들을 품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조홍희 서울국세청장 비리 두둔 의혹, KB금융지주회장 인사 개입 의혹, 신한금융지주 라응찬 회장 50억 비자금 비호 의혹, 선진국민연대 출신 인사들의 공기업 점령, 수상한 와인 연대 등 지금까지 나온 의혹만 해도 가지가 주렁주렁 늘어질 판이다.

 

이 나무의 뿌리에 물을 댄 사람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분류되는 영일대군(이상득)과 그의 오랜 집사(박영준 국무차장) 출신이라는 소문이 세간에 퍼진 지 오래다.

 

'언론-민주당' 합동 공세, '권력 암투' 국민 환멸 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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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1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수첩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대우해양조선의 정권 실세 측근들이 막대한 이득을 취해 특정 재보궐 선거에서 금권선거를 자행한다는 내용을 파악했다"고 폭로하고 있다. ⓒ 남소연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16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수첩에 적힌 내용을 토대로 "대우해양조선의 정권 실세 측근들이 막대한 이득을 취해 특정 재보궐 선거에서 금권선거를 자행한다는 내용을 파악했다"고 폭로하고 있다. ⓒ 남소연

불법 민간인 사찰이라는 하나의 사건이 대통령 측근 세력의 전횡까지 드러내도록 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은 언론과 야당의 힘이었다. 사건 초기, 언론은 불법 민간인 사찰을 지휘한 공직윤리지원관실이 특정 지역(영일-포항) 출신들로 채워졌다는 점을 밝혀냈고, '청와대 배후설'을 제기했다. 언론 보도는 국민들에게 큰 반향을 불러왔다.

 

야당은 곧장 바통을 이어받았다. 특히 민주당은 '영포게이트 진상조사특위'(위원장 신건)를 구성해 조직적인 대응에 나섰다. 이를 진두지휘한 사람은 DJ 정부에서 오랜 국정경험을 지닌 박지원 원내대표다.

 

박 원내대표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영포 라인'이 확인되자마자, 곧장 사건의 이름을 '영포게이트'로 바꾸고 당의 전력을 집중하도록 했다. 국가정보원장 출신의 신건 의원을 위원장으로 내세우고, 정무위·법사위·행안위 등 관련 상임위원들을 전진 배치했다.

 

이후 민주당은 권력 실세의 조홍희 서울청장 비호 의혹, 강남 메리어트호텔 모임, KB금융지주 어윤대 회장 선임 압력 행사, 신한금융지주 라응찬 회장 50억 비자금 등 세간에 떠돌던 의혹을 구체적으로 폭로하고 나섰다. 청와대와 총리실, 경찰청, 국민은행 등 관련 기관들을 지속적으로 찾아가 항의하고 때로는 농성도 했다.

 

야당의 이런 활동은 관련자들의 도피와 병원 입원, 정부의 자료 제출 거부 등 벽에 부딪혀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박 원내대표가 나서 "청와대 내부에서도 제보가 오고 있다"고 밝히면서, '권력 내부 암투'에 대한 국민들의 환멸도 커졌다.

 

박지원 수첩 속 '파란 글씨' 내용은?

 

현재 민주당의 '폭로전'은 잠시 소강상태다. 민주당은 이번 사건이 7·28 재보선을 넘어 9월 정기국회와 10월 국정감사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고,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무차별한 '폭로전'보다 원내 활동을 통해 의혹을 끝까지 해소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지만 물밑에서는 끊임없는 조사가 진행되고 있다. 민주당에는 '영포 라인'으로 상징되는 특정 세력의 전횡에 대한 제보가 벌써 수십건이 쌓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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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첩을 꺼내 든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28일 의원총회에서 정세균 대표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 남소연

수첩을 꺼내 든 민주당 박지원 원내대표가 28일 의원총회에서 정세균 대표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 남소연

박 원내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제보자도 많다는 게 당내 전언이다. 그는 수많은 제보를 직접 챙기고 있다. 퇴근 후인 밤 10~11시에도 전화를 걸어 온 제보자를 홀로 만나러 가는 일도 종종 있다는 게 주변의 얘기다. 박 원내대표의 상징처럼 돼 있는 김대중도서관의 '포켓용 수첩'이, 불법 민간인 사찰 사건 이후 2~3권 정도 늘었다는 소문도 있다.

 

박 원내대표는 들어온 제보 중 신빙성이 높은 사건은 파란색 볼펜으로, 일반 제보 사건은 검은색 볼펜으로 즐겨 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그의 수첩에는 파란색 볼펜으로 쓰인 제보가 10여건 정도 쌓였다고.

 

청와대 수석급 인사 A씨의 재산 증식 의혹, 선진국민연대 출신 B씨의 시중 은행 투자 외압과 그로 인한 손실 무마 의혹, 금융권 인사 C씨의 30억원 상납 의혹, 선진국민연대 출신 D씨의 불법 대출 의혹, 공기업에 진출한 핵심 실세 측근 E씨의 비리 의혹 등이 구체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본인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고 한다. 박 원내대표는 신빙성 있는 제보를 영포게이트 진상조사특위 위원들에게 조사하도록 일임했다. 물론 제보자의 신분은 철저히 비밀에 붙여졌다.

 

백번 잘해도 한번 잘못하면 공든 탑 '와르르'

 

그는 최근 영포게이트 특위 회의자리에서 '백공일과'(百功一過) 네 글자를 유독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백번 잘해도 한번 잘못하면 공든 탑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철저히 확인하라는 지침을 내린 셈이다.

 

수많은 제보가 담긴 박 원내대표의 수첩은 '독과'를 맺은 나무를 찍어 낼 '도끼'로 변하고 있다. 영포게이트 특위의 조사가 어느 정도 마무리 되면 '2차 폭로전'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다. 8월 이후 열릴 각종 상임위에서, 의혹과 관련된 인사들이 야당의원들에게 곤욕을 치를 수도 있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철저하게 무시하거나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온다면, 민주당의 공세도 한계에 부딪힐 가능성이 있다. 현재까지 그는 민주당 안팎에서 적절하게 완급 조절을 잘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번엔 영포게이트 의혹 해소라는 숙제를 떠안게 됐다. 박 원내대표의 전략과 협상 능력에 다시 한 번 관심이 쏠리는 이유다.

#영포게이트 #민주당 #박지원 #수첩 #선진국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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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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