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타이지그가 잠들어 있는 심양 북릉 공원에 있다.
이정근
정묘호란으로 맺어진 '형제맹약'을 파기한 청나라가 제고지문을 보내 군신관계를 요구했다. 이에 조선이 불응하자 11월 25일까지 왕자를 보내라고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조선은 주화파와 척화파가 첨예하게 대립해 논쟁하느라 통첩시한을 넘겼다. 자신의 요구를 묵살했다고 분노한 홍타이지는 동정군(東征軍)을 일으켜 사령관에 도르곤을 임명하고 조선을 벌(伐)하라 명했다.
압록강을 건넌 청나라군은 파죽지세로 한성을 향하여 내달렸다. 의주부윤 임경업이 지휘하는 군대는 '후미를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백마산성으로 들어가 버리고 저항하는 조선군은 없었다.
청나라 침공 사실을 국경수비대로부터 보고받은 도원수 김자점은 '소식이 도성에 알려지면 민심이 놀란다'며 정방산성에서 봉화를 차단했다.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정방산성은 관서 군사요충이며 김자점의 군영이었다.
청나라의 침공사실이 조정에 알려진 것은 '청군이 송도를 지났다'는 개성유수의 장계였다. 이 때 이미 청나라군은 도성 밖 양철평에 이르렀다.
사장(四將)이 서로 견제하는 조정심야의 회의는 계속되었다.
"영남에 보낼 장수를 정해야 합니다."김자점이 아뢰었다.
"최만득이 어떻겠습니까?"구인후가 천거했다.
"그는 장사입니다만 대임(大任)을 맡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김자점이 반대했다. '적합하지 않다.'라는 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누가 장수에 적합한지 경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인조가 구인후에게 눈길을 주었다.
"김운해가 어떻겠습니까?""김운해는 명성이나 지위가 미약해서 제대로 사태를 진정시키지 못할 듯합니다."김자점이 또 반대했다. 그는 자신의 수족, 변사기를 보내고 싶었으나 그가 훈국 중군(訓局中軍)에 근무하고 있어 내려 보내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훈련도감 중군은 지방으로 파견할 수 없도록 법으로 규정해놓은 것이 원망스러웠고 평안 병사로 있던 변사기를 너무 일찍 도성으로 불러들인 것이 발등을 찍고 싶을 만큼 후회스러웠다.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를 떠받치고 있는 4인이 있다. 이들을 저자에서는 넉 장(四將)이라 조롱했다. 다섯 장이라야 제 몫을 할 수 있는데 낙장이라는 비아냥이다. 김류, 김자점, 구인후, 이시백이다. 이들은 세력이 커지면서 서로 반목했고 갈등했다. 자신의 수하를 요직에 앉히려 경쟁했고 공을 세울 곳이면 자신의 수족을 파견하려 눈에 쌍심지를 켰다.
믿는 것은 피붙이 뿐이다심야의 회동은 역당 진압 적임자를 정하지 못한 채 파했다. 나가려는 구인후를 인조가 돌려세웠다.
"적도들의 동향이 염려스럽기 그지없으니 경은 동영(東營)에 머물면서 다른 변고를 살피도록 하라."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도 있지 않은가. 강 건너 역당도 걱정이었지만 권력 핵심부의 동요가 두려웠다. 누가 반기를 들고 궐을 넘볼지 모른다.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이 밤, 인왕산 기슭에서 검은 그림자가 작당하여 창의문을 부수고 도성에 들어 올 것만 같았다.
이튿날, 총융사 이시백이 군사 5백 명을 이끌고 경기 진위로 떠났다. 인조는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선전관을 공청도에 보내 공청 병사 배시량으로 하여금 군사를 출동시켜 적의 소굴을 섬멸하게 하였다.
덧붙이는 글 | 훈국(訓局)-훈련도감
동영(東營)-대궐에 주둔하고 있는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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