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병원이 돈벌이에 몰입하면 안 되지"

[30년 부평지킴이] 인천의 종합병원 '첫 치과의사' 김건일 원장

등록 2010.07.29 18:28수정 2010.07.29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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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살, 인천의 첫 종합병원 치과의사


진료를 시작한 레지던트 시절부터 포함하면 40년 넘게 치과진료를 하고 있는 '김건일 치과의원'의 김건일(66·사진) 원장은 부평에서만 꼬박 36년을 보냈다. 김 원장이 치과의사로 첫발을 내딛던 때 인천에는 종합병원이 두 곳밖에 없었다. 한 개는 동인천에 있는 인천기독병원, 또 다른 한곳은 부평에 있는 성모자애병원(현 인천성모병원)이었다. 김 원장은 36년 중 20년 세월을 인천성모병원에서 보냈다.

"대학 졸업 후 서울 성모병원에서 레지던트로 근무하다가 군 전역 후 은사님이 성모자애병원을 추천했다. '성모자애병원에 치과를 처음으로 개설하는데 자네가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니 한번 맡아보는 게 어떤가?'라고 제안했다. 전에 여러 차례 진료를 왔던 터라 남의 병원 같지 않아 흔쾌히 받아들였다."

군 전역을 마친 김건일 원장은 그렇게 인천의 첫 종합병원 치과의사로 부임했다. 1975년 6월 1일이었고, 그의 나이 막 서른 살이었다. 당시 인천의 종합병원 두 곳 모두 치과가 없었고, 그가 인천성모병원에 오면서 인천에 첫 치과병동이 들어섰다.

a 김건일 치과의사 김건일 치과원장이 인천의 첫 종합병원 치과의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나이 막 서른 살이었다. 당시 인천의 종합병원 두 곳 모두 치과가 없었고, 그가 인천성모병원에 오면서 인천에 첫 치과병동이 들어섰다.

김건일 치과의사 김건일 치과원장이 인천의 첫 종합병원 치과의사로 부임했을 때 그의 나이 막 서른 살이었다. 당시 인천의 종합병원 두 곳 모두 치과가 없었고, 그가 인천성모병원에 오면서 인천에 첫 치과병동이 들어섰다. ⓒ 김갑봉


70년대 부평은 부평공단(수출4공단)과 주안공단(수출6공단)을 중심으로 산업화가 시작됐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이 대거 몰려들기 시작했다. 인천의 치과의원이 30여 군데에 불과했으니, 그가 있는 치과병동은 늘 붐볐다.

김건일 원장은 명색이 종합병원 치과병동 과장이었지만, 치과의사는 그 혼자였다. 혼자서 많은 것을 감내해야 했다. 정상적이라면 오전 8시에 진료를 시작해 오후 5시 반이면 퇴근해야했지만, 퇴근 시간은 밤 11~12시를 넘기기 일쑤였다.


그런 그에게 가장 힘이 됐던 사람들은 나이 많은 타 진료과목 과장들이었다. 그는 "퇴근해야 하는데 퇴근을 안 했다. 처음엔 몰랐다. 알고 보니 오후 6~8시 무렵 사고가 많아 응급환자들이 몰려오기 때문이었다. 의사가 많지 않아 언제 올지 모르는 환자를 위해 대기하고 있었던 게다. 지금도 당시 선배 의료진을 존경하고 있다. 나 역시 그 길을 따라 그렇게 살았다"고 말했다.

김 원장이 기억하는 그 무렵 저녁 때 많았던 사고는 '턱뼈'수술이었다. 그는 "자가용이 없으니 대부분 교통사고는 택시에서 발생했다. 택시 미터기가 조수석 앞에 부착돼 있어서 사고만 났다하면 승객 입주변이 그대로 미터기에 부딪히는 사고가 발생했다. 지금은 이런 사고가 없지만 그 땐 정말 많은 사고였다"고 말했다.


돈 없어 방치하다 뽑는 게 다반사

김건일 원장은 종합병원 치과병동 과장으로 있으면서 웃지 못할 해프닝도 많이 겪었다. 인천의 두 곳뿐인 종합병원에서, 그것도 유일한 치과병동 과장이니 지역에선 '유지(?)'로 통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지역에서 '방귀 좀 낀다'는 사람들이 특권층을 위한 진료 같은 것을 원했고, 실제로 그런 일은 지금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김 원장은 그런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지금도 거리를 두고 있다.

뒤에 얘기하겠지만, 사실 그가 특진이나 돈벌이를 위한 진료와 거리를 멀리 둔 것은 그가 종합병원을 그만두는 이유 중 하나가 됐다. 종합병원을 그만 둔 지 1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기에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김 원장은 "난 그런 거 정말 싫어한다. 아픈 사람이면 다 아프지 빈부에 따라 덜 아프고 더 아프지 않다. 그래서 다 동일하게 대했다"라고 한 뒤 "그래도 젊었을 때 재미난 것은 종합병원이 힘 있는 병원이라, 지역 유지들이 자꾸 보자고 할 때면 못 이기는 척 참석해 맛있는 것을 많이 먹었던 기억이 난다"고 웃으며 말했다.

치과의사로서 가장 속상했던 기억은 결국 이를 뽑을 수밖에 없는 때였다. 아플 때 조금만 더 일찍 왔더라면 뽑지는 않았을 텐데 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김 원장의 진심이다.

김 원장은 "치과의사는 원래 이를 가급적 보존해 주려는 진료행위를 해야 한다. 최후의 수단으로 뽑아야 한다. 그런데 당시엔 치과에 오려고 해도 먹고 살만 한 사람들이 오는 때였다. 그러다 보니 없는 사람들은 뽑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는 병원에 와보지도 못했던 사람들도 꽤 많았던 때였다. 안타까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이는 통증이 올 때 참으면 더 커지는 법이다. 그러니 바로 치과에 가는 게 비용이 덜 든다"고 전했다.

40년 넘게 치과를 운영하고 있는 그는 예나 지금이나 환자들과 투쟁한다. 하나는 시간 약속이고, 하나는 다름 아닌 진료비다. 그래도 지금은 시간약속은 많이 나아졌다고 했다.

그는 "병원은 적고 환자는 많으니 시간이 중요했다. 지금은 정보통신 이런 게 잘 돼 있지만 그 땐 어디 그랬나? 그래서 종이에 적어 주기도 했다. 많은 서민들의 진료를 맡다보니 어떻게 하면 시간 약속을 지키게 할까 고민했다"라고 한 뒤 "고백하건데 나도 이게 직업이니만큼 돈을 벌어야한다. 다만 더 벌기 위한 경영마인드가 싫을 뿐"이라고 말했다.

a 김건일 치과원장 "아픈 사람이면 다 아프지 빈부에 따라 덜 아프고 더 아프지 않다" 김 원장이 의사로서 지니고 있는 철학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가 왜 영리병원 도입에 반대하는 지 더욱 선명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건일 치과원장 "아픈 사람이면 다 아프지 빈부에 따라 덜 아프고 더 아프지 않다" 김 원장이 의사로서 지니고 있는 철학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그가 왜 영리병원 도입에 반대하는 지 더욱 선명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 김갑봉


돈벌이에만 집착하는 세태 안타까워

20년 동안 종합병원 치과병동 과장으로 있던 그는 이순의 나이에 종합병원을 나선다. 그런 뒤 1994년 2월, 부평역 앞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치과의원을 개설했다.

종합병원을 나서게 된 데는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나이가 있으니 승진해야 했으나 20년째 과장이었고, 병원에는 올라 갈 자리가 없고, 심지어는 그가 과장으로 있는 치과에 부과장도 없었다. 사실상 위아래가 막힌 상황이었다.

"오십이 되도록 만년 과장이니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도 벌어보자고 생각했다. 다만 한 가지, 치과에 부과장을 채용하려면 내가 더 많이 벌어야했다. 즉, 과장이 경영마인드를 가지고 의료서비스에 임하면 방법이 있다. 치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가 돈이 안 되는 것을 열심히 추구하니 병원 측에서는 마음에 안 들었을 테고, 나는 그런 경영마인드가 싫으니 나올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원을 차린 뒤 의사로서 그의 외연은 더 넓어졌다. 이젠 그도 치과 의료계에서 원로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렇다 보니 후배 의사들에게 모범을 보이려 애쓴다. 그중 대표적인 일이 장애인을 위한 무료진료센터 운영과 영리병원 도입 반대다.

인천시청 앞에 있는 인천장애인치과진료센터는 주말에 무료로 운영된다. 장애인진료센터는 그가 인천치과의사협회장으로 있을 때인 2003년 인천지역 치과의사들의 지원으로 탄생했다. 원래는 두 곳이었으나 현재는 시청 앞에 있는 곳만 운영되고 있다.

김 원장은 "폐쇄된 곳은 지금 생각해도 안타깝다. 자폐증을 가진 한 장애인이 있었다. 치과에 있는 의자에 앉자마자 이를 꽉 깨물어 이가 다 깨져버리는 사고가 발생해 난리가 난 적이 있다. 모두들 충격이었다"라고 한 뒤 "그만큼 장애인 진료는 각별해야하고, 장비도 잘 갖추고 있어야 하기에 어렵다. 그런데 장애인건강보험은 엉망이고, 일반 치과의원이 장애인을 진료하기란 벅차다. 그래서 뜻을 모았다. 인천에서 안 되는 환자는 서울로 이송한다"고 말했다.

치과 의료계의 원로로서 그가 하고 있는 일 중 무거운 책임이 있다면, 최근 일고 있는 '의료경영' '영리병원' 등과 관련한 그의 행보다. '의사는 환자를 살피는 의사여야지 경영을 살피는 의사가 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김 원장은 사실 대한치과의사협회를 대표하는 의장이다.

"경영, 이윤을 추구해서 얻는 만족보다 양질의 의료를 국민들에게 제공했을 때 얻는 만족감이 더 크다. 의료경영이라는 말이 많이 부각되고 있는데, 물론 의사는 병원 진료를 통해 돈을 벌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 집중하면 안 된다"라고 한 뒤 "영리병원은 그 제도와 상관없이 결국 경영마인드를 요구하게 된다. 의사와 병원이 사람을 중히 여기지 않고 돈을 중히 여기면 결국 탈이 나게 돼있다. 영리병원을 도입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김 원장은 조금씩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은퇴에는 조건이 있다. 그는 "의사와 병원에 대해 저와 똑 같은 상각을 가지고 있는 후배의사를 만나면 제가 35년 동안 진료하면서 여기서 맺었던 모든 관계를 그대로 전해주고 싶다. 그러면 오는 사람도 새롭게 맡을 사람도 나와 같은 관계가 지속되니 좋은 것 아니겠냐? 그런 사람을 찾고 있다"라고 한 뒤 "치과의사는 환자의 원래 이를 살려주려 노력해야한다. 돈을 버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버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평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30년 부평지킴이 #김건일 치과의사 #대한치과의사협회 #돈 #영리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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