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책과 진실

[서평] 김열규의 <독서>를 읽고

등록 2010.08.07 09:40수정 2010.08.07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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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 신희선

표지 ⓒ 신희선

나는 책을 천천히 읽는다. 교과서도 소설책처럼 천천히 읽는다. 시험을 치면 중간고사 성적은 괜찮았지만 기말고사는 엉망이었다. 다시 책을 처음부터 천천히 읽느라 범위만큼 다 못 읽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책을 처음부터 천천히 읽지 않으면 나는 아무 책과도 친밀해질 수가 없었다.

 

대학생 때는 더 심해져서 시험 기간인데 현대시를 더 잘 공부하기 위해 한자공부만 열심히 하다가 시험을 치기도 했다. 나는 내가 책 읽는 방법이 가장 옳다고 믿었던 것 같다. 단 한 가지 방법으로 책을 읽는 내게 김열규 교수는 평생을 통해 책을 만난 과정과 그 만남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는 1932년 경남 고성 출생으로 국문학과 민속학을 전공하고 한국학의 석학이 되었다. 그의 연구의 중심은 한국인이며, 한국인의 죽음론과 인생론을 완성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책을 읽어보면 그 죽음론과 인생론은 릴케와 토마스 만과 책을 파고드는 고독에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의 앞부분은 그가 어린 시절 외할머니의 옛날이야기를 들으며, 어머니의 언문제문을 들으며 상상했던 것에서 시작한다. 중학생 시절에는 헤르만 헤세를 읽고, 영혼의 눈을 뜨는데, 소설의 해설이나 서문을 먼저 읽지 않는 읽기방법이 나하고 똑같았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 자연 속에서 산책하듯이 책을 읽고 있다는 지점까지 이른다.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그가 외워 읽기에 대해 말할 때이다. 그는 짧은 시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간추려서 아예 외우는 버릇이 있다. 책을 외운다는 것은 책을 먹어버렸다는 느낌을 준다. 외우고 있는 것만큼 꼭 살아있는 것이라는 문장은 다시 외할머니에게 바쳐진다.

  

책의 뒷부분은 그가 보여주고 싶은 여러 가지 읽기 방법이 제시되고, 좋아하는 책에 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언급된다. 그가 강조하고 싶은 읽기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들을 모두 뭉뚱그리면 '읽기의 소요유(逍遙遊)'라는 이 책 절반의 제목이 된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이틀 밤낮을 걸려서 고기를 배에 매달고 육지로 돌아왔지만 고기는 상어떼가 다 뜯어먹고 뼈만 남았다. 노인은 "아무것도 아니야, 너무 멀리 나간 것뿐이야"라고 말한다. 일에 바친 열정이 중요했을 뿐 결국 무엇을 얻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소설 속 노인의 혼잣말은 장자의 소요유, 곧 그의 책읽기의 방법론이다. 

 

그는 평생을 책과 함께 살았지만 소설가나 시인이 되지 못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굉장히 솔직하여 놀랄만한 고백을 책 중간에 적고 있다. 이웃집 형과 수영을 하러 바다에 갔다가 형이 갑자기 쥐가 났다. 그는 형을 위해 목숨을 걸 수는 없었다고 적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더는 넘을 수 없는 경계선에 대해 정확하게 말한 것이다.

 

독서는 사실 어떤 이야기를 듣기 위해 치르는 비용이 가장 적은 효율적인 행위이다. 독서는 그 때문에 사랑하는 행위보다 살아있는 행위보다는 안전하다. 하지만 책을 오랜 시간 깊이 읽은 사람의 고백일수록 너무나 진실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어떤 잡지기자는 안 읽은 책을 읽은 척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말했다. 나의 독서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하여 나는 책 읽다가 늙어 죽을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진실할 수 있다면 그만이다. 

2010.08.07 09:40 ⓒ 2010 OhmyNews

독서 - 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 읽기

김열규 지음,
비아북,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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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로 살아온 한 평생

#김열규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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