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겉그림
한겨레출판
<당신 옆을 스쳐간 그 소녀의 이름은>(한겨레출판)은 2010년 한겨레문학상(제15회) 당선작이다. 작가는 <실천문학> 신인상(2006년)으로 등단한 최진영이다.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나이는 물론 이름조차 행방불명된 소녀다. 소녀는 자신의 이름을 이년 혹은 저년, 그리고 언나, 간나 정도로 알고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불렀기 때문이다.
거의 매일 매순간 술에 빠져 사는 아빠에게 172째로 맞고 엄마가 135번째로 밥을 굶긴 날, 소녀는 자신을 버렸을 '진짜 엄마'를 찾아 집을 나와 버린다. 그리하여 오직 진짜 엄마를 찾겠다는 목적만으로 세상의 후미진 곳들을 떠돌게 된다.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못되게 굴어야 한다. 착하면 피곤하다. 사람들은 착한 사람을 우습게보고 제 뜻대로 이용하려 드니까. 게다가 착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닌 일로 괴로워하고 미안해한다. 잘되면 남 탓, 못되면 자기 탓이다. 그런 사람들은 따로 동네를 만들어서 그곳에만 살게 해야 한다. 그래야 착한 사람도 덜 괴롭고 착하지 않은 사람도 덜 불편하다. 아무튼, 사람들이 나를 괴롭게 할 때마다 나는 마음의 이빨로 진짜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꼭꼭 씹는다. - <책속에서> 자신을 짐승 취급하는 남자를 떠나지 못하는 황금다방의 장미언니, 하루에 손님 몇 밖에 오지 않는 허름한 국숫집인 태백식당의 할머니, 살인과 음란한 정사 등이 밤낮으로 벌어지는 폐가에서 하루에 한번 나가 밥을 얻어먹으며 사는 남자, 불을 삼키거나 내뿜는 묘기로 장터나 축제장을 떠도는 각설이패….
소녀가 만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불행하고 불운한 사람들이다. 가진 것이 없어서, 실패했기 때문에, 못났기 때문에 '가짜' 취급을 받는 그런 사람들이다.
소녀는 이처럼 '가짜 인생'들 사이를 떠돌며 이제까지 전혀 몰랐던 행복을 맛보기도 한다. 하지만 행복과 삶의 평화를 느끼는 순간 소녀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버려지고 만다. 버려짐이 반복되면서 소녀는 자신만의 시선과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누군가가 웃으려면 누군가는 반드시 울어야 한다', '세계의 가짜를 다 모아서 태워버리면 결국 진짜만 남을 것이다'라고 믿게 된다.
나를 알아보는 건 나만큼 가난하고 배고프고 추운 사람들이다. 할머니도 그랬고 대장도 그랬다.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라면을 끓이는 저 남자도. 나의 진짜 엄마 역시 가난하고 배고프고 추워야만 한다. 그래야 나를 알아볼 테니까.진짜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니까 각자 모른 채 살면 행복할 수도 있는데, 만나서 불행할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진짜 엄마를 찾아야 하나? …찾아야 한다.…왜냐면 그것 외엔 할 일이 없으니까. 진짜 엄마를 찾겠다는 목적마저 사라진다면 나는 더 살아있을 이유가 없다. 목적이 없으면, 가짜 아빠처럼 쥐의 먹이가 되고 말 것이다. -<책속에서>또, 소녀는 자신이 만난 세상과 현실에 따라 자신이 찾아야 하는 '진짜 엄마'를 바꾸기도 한다. 그러가 하면 '진짜 엄마를 찾는 이유는 그리워서도 필요해서도 아닌, 가짜는 절대 증명할 수 없는 가짜를 증명하기 위해서'라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한다.
소녀가 진짜를 찾아 나선 길에서 만나는 세상의 수많은 고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 때문에 버려지며 느껴야만 하는 감정들은, 아마도 나와 당신이 일상에서 수도 없이 겪고 있지만 애써 외면하거나 눌러 참아야 하는 소외, 슬픔, 박탈감, 허무감 등은 아닐까.
'가짜'가 돼 버린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작가는 '일찌감치 동심을 빼앗겨버린 소녀'의 시선과 감정을 통해, 가진 것 없고 못나고 성공하지 못해 '가짜'가 되어버린 다양한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들을 들려줌으로써 "당신의 그 아픔을 우리 중 또 누군가도 겪고 있노라, 알고 있노라"고 위로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소녀의 진짜 엄마는 우리들 또한 반드시 찾아야 하는 삶의 소중한 그 무엇, 결혼하고 애 낳고 살다보니 나도 모르게 놓아버린 그런 어떤 것들, 적어도 지금보다 가진 것이 많다면 덜 속상하고 덜 쪼들리고 덜 주눅 들어도 되는 그런 것 아닐까.
책을 읽으며 자꾸 내안의 감정들이 돌아 보아지고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각설이패를 도망치듯 떠나 서울에 도착해 떠돌던 소녀는 자신과 비슷한 상처로 또 다른 세상을 떠도는 가출 소녀 유미와 나리를 만나게 된다. 그런 얼마 후 나리가 새 아빠의 성폭행에 희생당하나 자살로 위장되자 '어떤' 결심을 하고야 만다.
<당신 옆을 스쳐간 소녀의 이름은>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성장담이자 모험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이 작품에 한 표를 던진 것은, "예술가의 사명은 논쟁의 여지가 없도록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삶에 애착을 지니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던 톨스토이의 저 오랜 신념을 신봉하기 때문이다. 낯선 세상에 오직 '물음표'를 앞세우고 전진하는 천진난만한 소녀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회색빛 세상이 어느새 '드드득'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때, 우리는 문득 뒤돌아 볼 것이다. 내 옆을 스쳐간 소녀의 표정을, 그토록 심드렁했던 풍광을. 삶의 감각은 언제나 우리를 둘러싼 위대한 단순성 속에서 새로워질 수 있다.- 정은경(문학평론가) 추천의 글공지영을 비롯하여 박범신, 김선우 등 꽤나 유명한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이 소설을 추천하고 있다. 이들은 한겨레문학상 심사위원들로 '귀하고 탁월한 감수성과, 말을 다루는 재주가 빼어나다'는 심사평과 함께 만장일치로 이 작품을 선정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