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낮 서울 금천구 가산동 옛 기륭전자 사옥 앞에 있는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해고된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선대식
옥상에서 내려와 조합원들이 4년째 지내고 있는 컨테이너 박스로 들어서자, 조합원 유흥희(41)씨가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곳 벽에 붙어 있는 2008년 단식 당시의 신문 기사가 눈에 띄었다. '기륭전자에 관심을 가져야'라는 제목의 신문 칼럼이 누렇게 바랜 채 곧 떨어질 것처럼 벽에 붙어 있었다.
약봉지와 법원에서 보내온 우편물이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에 대해 유씨는 웃으며 "오랜 기간 투쟁하다보니 집시법 위반 등으로 전과 10범이 됐다, 2년 전에 경비실 옥상에 올라가 단식한 것은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이라며 "많은 조합원들이 약을 달고 살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다, 긴 투쟁의 훈장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 물려주고 싶지 않아"점심시간이 지나 김소연 분회장을 만났다. 2008년 단식 때보다 살이 쪘지만 여전히 마른 모습이었다. 목은 쉬어 있었다. 국회 토론회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현대자동차의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으로, 불법파견 노동자도 2년 이상 근무하면 원청회사인 현대차가 정규직으로 고용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지난달 22일 대법원 판결에 대한 토론회였다.
그에게 후폭풍이 일고 있는 이번 판결이 기륭전자 등 불법 파견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김 분회장은 "불법 파견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큰 희망을 주는 판결이지만, 대기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조업 파견직은 2년 미만 근무자인 탓에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실제, 지난 2008년 4월 대법원이 부당해고 무효소송을 낸 기륭전자 해고자들에게 "기륭전자가 해고의 당사자가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린 것도 이들이 2년 이상 근무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회사는 불법 파견에 대한 벌금 500만 원을 납부했을 뿐, 해고자들은 구제받지 못했다.
- 제조업 직접생산공정업무는 파견 대상이 아니잖아요. 불법 파견이더라도, 이들에 대한 구제가 불가능한가요?"파견법에는 제조업의 직접생산공정에도 일시적으로 인력확보가 필요하면 파견노동자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돼 있어요. 사용자들은 이를 악용해 계속 파견노동자를 사용하죠. 대부분 3~6개월 초단기 파견이에요. 불법 파견이지만 2년 이상 근무하지 않아 구제할 방법이 없어요. 사용자가 벌금만 내면 돼요. 한 달에 잔업과 특근 60시간을 해도 월 120만 원 받는 이들의 고통이 계속되고 있는 상황이죠."
- 그렇지만, 이명박 정부는 친서민 정책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잖아요. 어떻게 보세요?"고용노동부는 제조업 등에 대해 파견을 확대할 계획을 세우고 있어요. 비정규직을 확대하겠다는 것인데, 이게 어떻게 친서민 정책인가요.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알잖아요. 기륭전자가 2008년 단식 당시 교섭에서 우리를 외면했던 것도 이명박 정부의 압력 탓이라고 봐요."
대화 도중 여러 차례 언성을 높였던 김 분회장은 벽에 붙은 아이 사진을 보며 활짝 웃었다. 조합원들의 아이들이다. 긴 투쟁기간 동안 조합원들이 결혼해 아이를 낳았고, 이제 그 아이가 걸어 다닌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그는 "사진을 보면, 부모가 아이들에게 이런 세상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알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