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학금 타기’ 백일장에 나가서 쓴 시

[내가 살던 인천 16] 새얼백일장에 나간 고3 수험생

등록 2010.08.20 13:42수정 2010.08.20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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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앞서부터 목포에서 살면서 일하는 우리 형은 저보다 글을 즐겁게 알뜰살뜰 잘 쓴다고 느낍니다. 우리 형은 일찍부터 글을 썼으나 어느 때부터인가는 글을 쓰는지 안 쓰는지를 알 길이 없습니다. 써 놓고 아무한테도 안 보여주는지, 몇몇 가까운 벗한테만 보여주는지 모릅니다. 우리 형은 열 몇 해 앞서 시집을 한 권 내놓은 적이 있으나, 형 스스로 시집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따로 밝히지 않습니다.

 

1988년 여름날 '인천 새얼문화재단'에서 마련한 '새얼학생백일장'에 나간 고등학교 1학년인 우리 형은 '시 쓰기'에서 상을 받습니다. 아버지는 우리 형이 '학교 성적이 떨어진다'며 이래저래 잔소리와 꾸중이 잦았는데, '학교 성적이 떨어진다'고 하는 우리 형이 백일장에서 '시 쓰기'로 상을 받습니다.

 

작은 집에서 같은 방을 쓰고 있던 동생인 저는 우리 형이 백일장 같은 데에 나가면 으레 상을 받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럴 만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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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새얼백일장 알림쪽지와 1988년에 형이 받은 '꽃패'. ⓒ 최종규

1993년 새얼백일장 알림쪽지와 1988년에 형이 받은 '꽃패'. ⓒ 최종규

 

1993년 5월 1일, 인천 지방 공무원 교육원 앞마당에서 여덟째 '새얼학생어머니백일장'이 열립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93년 4월 끝무렵, 학교 교사들은 '3학년 학생들을 새얼백일장에 보내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모임을 합니다. 다가오는 입시 시험에 하루라도 빠지면 뒤처지니까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는데, 문예반 국어교사한테 '백일장에 나가 상이라도 타면 나중에 면접을 보며 점수를 더 받지 않습니까' 하는 말을 들이밀면서 제발 백일장에 나가도록 해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어떠한 목소리와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 길이 없지만, '3학년 학생은 빼고 1학년과 2학년만 보내기로 하겠다'던 학교 틀이 바뀝니다. 3학년인 저하고 문예반 동무 여럿이 학교를 하루 쉬고 백일장 자리에 갑니다. 그러나 백일장에 간 우리 학교 아이들은 모두 '상을 못 받'습니다.

 

백일장이란 글솜씨를 겨루거나 뽐내며 상을 타내려고 하는 자리입니다. 이런 자리에 나가는 우리들은 마땅히 '상을 받을 글'을 쓰려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어떻게 하면 심사위원 입맛에 맞출까, 어떻게 해야 뭔가 그럴싸한 글을 뽑아낼까 하고 마음을 쏟습니다.

 

심사위원 입맛에 맞춘들 상을 받을 수 있지는 않을 텐데, 제도권 입시교육에 찌들 대로 찌들며 살아가는 어줍잖은 우리들로서는 내 넋과 눈길과 삶을 글 한 조각에 고루 담아내겠다고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다만 한 가지, 모처럼 오늘 하루는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서 풀려났다는 짜릿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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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렵 백일장은 '장학금 타기' 경연대회였고, 이 자리에 나가서 원고지 한 장을 챙겨, 제가 적어서 낸 시를 뒤에 적어 놓았습니다. ⓒ 최종규

이무렵 백일장은 '장학금 타기' 경연대회였고, 이 자리에 나가서 원고지 한 장을 챙겨, 제가 적어서 낸 시를 뒤에 적어 놓았습니다. ⓒ 최종규

1993년부터 열일곱 해가 지난 오늘에 이르러 돌아보건대, 그날 그곳에서 제가 써야 했던 글은 자연이니 바다이니 인천이니 뭐니 하는 뜬구름잡는 글감만 주어진 백일장이었다 할지라도 '오늘 하루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받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홀가분한가'하는 이야기였습니다. 자율학습 한 번 안 하는 데에도 이렇게 새처럼 가벼우며 구름처럼 하얀 마음이 될 수 있다고 노래해야 했습니다. 주말조차 주말답게 보낼 수 없는 우리한테 여느 날 하루를 송두리째 쉬며 즐길 수 있도록 백일장이라는 자리를 애써 마련해 준 분들한테 고맙다는 뜻을 글로 담았어야 했습니다.

 

아마, 백일장에 나왔기 때문에 입시 공부에서 하루를 쉴 수 있어 고맙습니다 하고 글을 썼다면 비아냥거리거나 비웃는 느낌이 짙은 글로 기울 만합니다. 그러나 비아냥이나 비웃음이 아닌, 참말 기쁘고 좋아서 이 백일장 같은 자리가 좀더 늘고, 우리들이 저마다 다르게 잘하거나 좋아하는 솜씨를 뽐내거나 나누도록 어른들이 마음을 바쳐 준다면 한결 낫지 않겠느냐는 목소리를 담을 수 있어요. 글잔치인 백일장을 비롯해, 그림잔치와 사진잔치와 노래잔치를 마련해 볼 수 있습니다. 학교끼리 친목을 다지는 체육대회를 공설운동장에서 벌일 수 있겠지요. 달리기잔치를 해 볼 수 있습니다. 꼭 운동선수만 나가는 자리가 아니라, 여느 동무들이 여느 놀이마당에서 즐기거나 어우러질 수 있도록 해 주면 됩니다.

 

국민학교 때에도 곧잘 백일장이나 경시대회에 학교 대표로 뽑혀 나갔습니다. 국민학교 때에는 '인천이 바다를 끼고 있는 곳'인 만큼, 군함에도 타고 잠수함에도 타면서 '바다를 글감 삼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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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을 타고 못 타고를 떠나 글잔치를 나누는 좋은 나날임을 헤아리도록 해 주는 학교교육을 바라기는 어렵겠지요. ⓒ 최종규

상을 타고 못 타고를 떠나 글잔치를 나누는 좋은 나날임을 헤아리도록 해 주는 학교교육을 바라기는 어렵겠지요. ⓒ 최종규

1993년 5월 1일 토요일(아쉽게도 토요일이었으나, 토요일에도 어김없이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으로 저녁까지 학교에 붙잡혀 있어야 했습니다) 백일장 자리에서 저는 '월미도'라는 글감으로 시를 썼습니다. 누구한테 내보이기에 참 부끄러운 글이고, 오늘 눈길로 다시 읽자니 마지막 연은 넣지 말아야 했구나 싶습니다. 열일곱 해 앞서 고등학교 3학년 눈길로 바라본 월미도 이야기를 옮겨 봅니다(마지막 연은 빼고).

 

 월미도

 

 왜 월미도에는

 맥주병과 청바지가 춤추어야 하는가.

 고스톱과 술주정의 공간이어야

 문화의 거리가 되는가.

 

 낙서기둥 8개에는

 무엇이 채워지는 것인가.

 말하고 싶은 것이 나와 애인의 이름뿐이고,

 너저분한 숫자의 나열만이 으뜸인가.

 

 누런 바닷물에 꽂은

 긴 낚시줄은 깡통과 비닐을

 건져내려는 것인지.

 침을 뱉는다.

 

 네덜란드의 풍차바람을 쐬고,

 프랑스의 샹송에 머리 식힌 뒤,

 피카소의 그림으로 미술을 얘기하고,

 일본의 노래방에서 기쁨을 맛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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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 받은 꽃패는 형 책상서랍에 오래도록 잠자고 있었습니다. 형이 쓰던 책상을 모두 제가 물려받는 바람에 형 책상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꽃패 하나를 새삼스레 만나며 예전 일을 떠올립니다. ⓒ 최종규

형이 받은 꽃패는 형 책상서랍에 오래도록 잠자고 있었습니다. 형이 쓰던 책상을 모두 제가 물려받는 바람에 형 책상서랍에서 잠자고 있던 꽃패 하나를 새삼스레 만나며 예전 일을 떠올립니다. ⓒ 최종규

 

2010년 월미도는 1993년 월미도하고, 또 1988년 월미도하고 어느 하나 다를 구석이 없이 술담배와 바가지와 장사판으로 어우러진 '빈 껍데기 문화'만 울렁거리는 길바닥입니다. 인천시는 이런 월미도에 '월미은하레일'이라는 모노레일을 깐다고 수백 억인지 수천 억인지를 들이부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2010.08.20 13:42 ⓒ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는 다음과 같은 책을 써냈습니다.
<골목빛, 골목동네에 피어난 꽃>(호미,2010)
<사진책과 함께 살기>(포토넷,2010)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
<책 홀림길에서>(텍스트,2009)
<자전거와 함께 살기>(달팽이,2009)
<헌책방에서 보낸 1년>(그물코,2006)
<모든 책은 헌책이다>(그물코,2004)
<우리 말과 헌책방 (1)∼(9)>(그물코,2007∼2010)
#내가 살던 인천 #인천이야기 #새얼백일장 #백일장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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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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