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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간이나 늦게 학교에 간다고 좋아라하는 막내를 뒤로 하고 사무실로 출근하는데 밤새 태풍이 얼마나 흔들어 댔는지 가로수 잎사귀가 바닥에 빼곡하게 널브러져 있었다.
인천 방향 지하철이 운행을 중단했다 하니 거리는 발걸음 바쁜 직장인들로 메워져있다. 그 아래 밟고 또 밟힌 잎들이 물과 섞여 질척했다. 간간히 바람 섞인 비가 분무기 뿌리듯이 축축한 기운으로 넓게 퍼져서 얼굴은 수분 크림을 바른 듯 번들번들 했다.
태풍에 비상대기 중이던 직원들이 피곤한 얼굴로 쓰러진 나무들을 톱으로 자르고 트럭에 싣느라 분주하다.
곧바로 사무용 가방을 들고 나왔다. 지층에 주로 살고 있는 독거노인들을 찾아갔다. 습해서 곰팡이 얼룩덜룩 핀 지하방 앞에 한뼘 텃밭을 가꾸던 할머니가 태풍을 원망하며 말한다.
"밤새 얼마나 흔들어댔는지 고추가 쓰러지고 참외가 뽑혀 날라가고... 징혀..."
재미삼아 참외 두어 포기, 고추 대여섯 대 정도 심어 놓은 작은 화단에도 태풍의 피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좁은 골목길을 안으로 쑥 들어오면 사방이 막힌 작은 집이다. 그에 알맞은 작은 화단 한 쪽에 태풍이 뽑아버린 참외 한포기가 튼실하지 못한 대로 까실까실한 참외를 매달고 있다.
아기 주먹 만한 참외가 잎사귀 사이사이 청개구리처럼 숨어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저런 개구리색 참외를 어디서 볼 것인가 싶어서 봉지를 얻어 스프링처럼 돌돌 말려 올라간 줄기와 잎을 헤치고 참외를 따서 넣었다. 물어뜯으면 쓴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솜털 보송한 어린 참외 세알! 태풍 곤바스의 흔적이다.
사무실로 돌아왔다. 냉장고를 뒤져 종이 접시 하나를 찾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니 그럴듯하다. 직원들이 오며가며 신기한 듯 묻는다.
"아니? 언제 참외 서리하러 다녀왔대요?"
오후에 배도 출출하여 어린 참외를 이리 들고 저리 들며 무슨 향이 날까하여 코에도 대보았다가 급기야 유혹을 못 이겨 한입 베어 물어보았다. 씁쓰레할 것 같은 내 예상을 빗나가고 오이향이 입안 가득 돌았다. 오이 맛이다. 혹시 참외 닮은 오이?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봐도 역시 어린참외 맞다. 진노랑 옷을 노련하게 입은 늙은 오이 맛, 그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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