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루비노행 동춘호자루비노행 승객들이 속초항 부두에서 동춘페리에 오르고 있다.
박도
오후 2시 30분에야 승선을 시켰다. 동춘항운 측은 여행객 비수기로 승객이 없는 줄 알고 그 시간에 태워도 출항에 지장이 없기에 30분 늦춘 모양이었다.
가방과 선물보따리 쇼핑백에 어깨에 멘 노트북 가방 등, 짐을 끙끙 거리며 동춘호로 계단을 오르는데 진땀이 났다.
괜히 책을 많이 쌌다는 후회를 하다가도 오랜 배 여행에서, 열차 여행에서 보고자 가져가는 거라고 위안을 하면서도, 나는 참 인생을 스스로 불편하게 사는 못난이로 여겨졌다.
부두에서 동춘호 계단을 오르자 객실 매니저가 반갑게 맞이하고는 배표를 본 뒤 객실을 배정해 주는데 325호실이었다. 한 층 더 올라가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 8인용 침대 방이었다. 창으로는 바다가 환히 보였다. 그런데 배표에는 방 좌석이 지정되지 않아 바다가 잘 보이는 창 옆을 내 자리로 정하고는 짐을 내렸다.
속초항을 떠나다그런데 3시 출항시간이 가까워 오는 데도 내 방에는 아무도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없었다. 끝내 손님이 없는 것으로 보아 큰 객실을 나 혼자 독차지 하는 듯해 특실을 탄 기분 이상으로 횡재한 기분이었다. 만일 이 객실에 여덟 사람이 빼곡히 타고 간다면, 그것도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과 밤을 새워 간다면 얼마나 고역일까.
그런 체험을 이미 여러 차례 한 적이 있었다. 2005년 12월 미국 워싱턴에서 귀국 길에 하필이면 대한항공 파업기간이라 승객들이 아시아나항공으로 몰려 만석이었다. 내 옆 자리 좌우에는 100킬로가 넘는 미국인이 탔는데 인천공항에 내릴 때까지 그 틈바구니에서 고문당하는 기분이었다.
1907년 대한제국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주도로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이 강제로 맺어지고, 광무황제(고종)가 강제로 폐위하는가 하면, 군대까지 해산을 당했다. 그러자 안중근은 더 큰 뜻을 이루고자 고국을 떠나 동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로 결심하고는 그 해 가을 원산에서 청진으로 떠나는 배에 올랐다.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배는 일본경찰의 검문이 엄격하기에 청진에서 육로로 간도로 간 뒤 거기서 국경을 넘을 속셈이었다. 그때 안중근 의사가 원산항에서 배를 타고는 고국을 떠나는 그 마음을 백분지 일이라도 헤아리고자 동춘호 갑판에 올랐다.
오후 3시에 출항키로 한 배는 시간이 지나도 미적거렸다. 아마도 늦은 승객이 있나 보다. 3시 30분에야 배는 부두 쇠기둥에 묶은 굵은 닻줄을 올리고는 스크루를 천천히 돌렸다. 이윽고 동춘호는 예인선에 끌려 천천히 속초항을 벗어났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갑판에는 몇 승객들이 올라와 멀어져 가는 속초항을 바라보았다. 한 여인이 눈물을 글썽였다. 그는 나에게 금세 사연을 쏟았다. 자기는 러시아 하바로브스크 태생으로 2년 전 한국에 와 전북 부안의 한 멜론 농장에서 일했다고 한다. 비자 기한 만료로 귀국한다는 데 조금 전 하바로브스크에 사는 아들과 통화하자 갑자기 그 아들이 보고 싶어 눈물이 나왔다고 떠듬떠듬 말하면서 겸연쩍어 했다.
"돈 많이 벌어 가세요?""얼 마 못 벌 었 어 요."그는 서툰 우리말로 떠듬떠듬 대답했다. 짐작컨대 동포 2, 3세인 듯했다. 속초항이 가물가물 멀어지자 동해 바람이 세찼다. 갑판의 승객도 점차 객실로 들어갔다. 곧 동춘호는 북으로 뱃머리를 돌리고는 스멀스멀 북진했다. 혹이나 북녘 산하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까 뚫어지게 살펴도 공해 상 망망대해로 1만 톤이 넘는 동춘호도 한낱 일엽편주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