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맞은 세자매가 사실은 남편의 무의식이라고?

한국 민담에 현대적 의미 부여하는 책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

등록 2010.09.14 15:02수정 2010.09.14 15:02
0
원고료로 응원
a 표지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

표지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 ⓒ 민음인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는 융(Carl Gustav Jung)의 분석 심리학으로 한국 민담을 분석한다. 우선 이 책은 국내 최초 분석 심리학자의 저서로 의미가 크다. 저자는 한국인 최초로 분석 심리학 정식 코스를 마친 이나미다.

몇 년 사이 해외에서 정식 코스를 거친 정신분석학자(이창재 외)가 한국에 돌아왔는데, 이들이 활동하면서 정신분석학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고 프로이드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제 이 책의 출간으로 정신분석학과는 차이가 있는 융의 분석 심리학도 제대로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한국의 융에 대한 책은 추상성을 벗지 못했는데, 비로소 이 책으로 구체성과 사례를 지니게 되었다. 무척 반가운 일이며, 융에 대한 서툰 이해와 오해가 풀릴 것이 기대된다.

귀 기울일 만한 가설 제시하는 융의 분석 심리학

세계의 여러 민담을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의문이 생긴다. 민족과 지역을 넘어 놀랍게도 비슷한 플롯, 비슷한 상징들이 반복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우리가 잘 아는 '콩쥐 팥쥐'와 '신데렐라'는 닮은꼴이다. 또 우리의 '구렁이 신랑' 민담과 '미녀와 야수', '개구리 왕자'는 모두 공통적으로 동물과 결혼한 아가씨가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게 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서로 다른 문명권의 이야기가 왜 닮은꼴인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또 민담 속의 주인공 중에는 왜 왕자와 공주가 많은가? 또 왜 아버지(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주인공은 박해를 받는가? 왜 시기심 많은 의붓 형제들 때문에 고초를 받는가? 또 그럴 때마다 짐승, 현인, 마술사들이 나타나 도와주는가?


이에 대해 역사학이나 문화인류학에서도 나름의 설명이 있을 것이다. 농경문화나 가족 공동체의 특성 등과 연관 지어서 말이다.

융의 분석 심리학도 흥미로운 이론을 제안한다. 분석 심리학은 인간에게 공통된 집단 무의식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 집단 무의식에서 원형(archetype)이라는 질서를 찾아낸다. 즉 인간의 집단 무의식과 원형이 민담에 담겨 있기 때문에 세계의 민담이 닮은꼴이라고 본다. 이러한 분석 심리학의 견해는 일단 참고할 만하다.


민담에 현대적 의미 부여해 참된 자아 찾기에 나서

이 책은 융의 분석 심리학의 도움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민담들을 분석한다. 도식적인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 둔다. 그리고 그 해석이 우리의 삶, 사랑, 성장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현대 한국인의 심리 상태와 사회를 읽기도 하는 등 다채로운 미덕을 지닌다.

예를 들면, 저자는 '소박맞은 세 자매' 민담 해석을 통해 성숙한 결혼 생활을 위해 필요한 태도가 무엇인지 살펴본다. 저자는 소박맞은 세 자매가 사실은 남편의 무의식이라고 뒤집어 읽는다. 남자의 무의식 속에 아직 성숙하지 못한 여성성이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성숙한 결혼 생활을 위해 이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이러한 저자의 지적은 날카로운 점이 있어 읽는 동안 '뜨끔'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호랑이 잡은 피리' 이야기를 인생의 바닥에서 다시 올라가 행복해지는 법에 관한 훌륭한 교범으로, '도깨비 감투'는 감투, 즉 지위나 신분 등의 가면 뒤에 숨어 망가져 가는 자아에 대한 은유로, '호랑이 뱃속 잔치'는 힘든 과정을 견디는 이들에게 영감과 힘을 줄 수 있는 이야기로 읽어낸다.

이렇게 이 책은 옛 민담에서 오늘날 우리의 초상을 보고, 개인의 성장과 치유에 도움을 주는 이야기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친숙한 민담에 현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이를 현실에서 부딪치는 문제를 해결하고 참된 자기를 찾는 실마리로 삼는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 해석은 무척 인상적

이 책에서 시도하는 분석 중 압권은 역시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아닐까 한다. 저자는 이이야기를 완전한 자아의 독립을 위한 이야기로 해석한다.

우선 호랑이에게 잡혀 먹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잘 포장된 자식 사랑의 이기적인 뒷모습을 읽어낸다. '아이를 잡아먹는 호랑이가 된 어머니'는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자녀의 퇴행을 조장하며 유아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모의 상징이다. 어머니는 자녀들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자신의 신체와 영혼만이 아니라 자녀들의 건강한 삶마저 압살하는 것이다.

오누이가 호랑이를 피하기 위해 참기름을 바르고 도끼로 찍고 나무에 오르는 장면에 대한 해석도 일관된다. 처음엔 참기름 바르듯 거짓말도 하고 적당히 둘러대지만, 정면충돌의 순간을 맞이하여 도끼로 찍듯이 확실하게 서로 분리 독립하는 것으로 읽어낸다. 그리고 해와 달이 되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정리하자면, 호랑이는 부모 콤플렉스의 상징이며, 해와 달이 된 오누이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새로운 세계를 주재하는 창조자가 된다.

옛날이야기를 통한 인간의 보편적 무의식 탐구

저자는 '해와 달이 된 오누이' 외에도 '우렁이 각시', '선녀와 나무꾼', '개와 고양이', '견우직녀' 등 우리가 잘 아는 옛이야기에서 집단무의식의 원형을 찾는다. '여우누이'에선 무의식에 숨겨진 파괴적인 여성성을 찾고, '선녀와 나무꾼'에선 사랑의 시작과 변화, 성숙을 본다.

이렇듯 융의 분석 심리학에 의하면, 민담은 집단 무의식 속에 있는 원형을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이 책은 쉽게 쓰여 분석 심리학의 여러 용어들의 쓰임새도 절로 익힐 수 있다. 즉 아니마, 아니무스, 그림자, 페르소나, 참-자기 등은 물론이고, 수동 공격형 방어, 부정적 동일화, 충동 조절 장애 등의 개념도 사례를 통해 쉽게 이해할 수 있어 무척 유용하다. 따라서 이 책은 분석 심리학의 훌륭한 입문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분석 심리학을 모르는 일반 독자에게도 흥미로운 민담을 통해 그 숨은 의미를 찾아가는 재미를 주며 자아의 성장과 치유에 도움까지 주는 좋은 책으로 보인다.

약간의 의문, 혹은 융에 대한 서툰 이해?
이 책을 읽다보면 약간의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근대 이전에 형성된 민담을 근대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옳은 해석인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대표적으로, '개성화'가 그러하다.

많은 민담을 개성화로 이해하는데, 개성화는 산업혁명으로 가족과 공동체 중심의 전통 사회가 해체된 이후에 나타나는 역사적인 현상이다. 그러니까 개성이란 근대의 발명품이라 할 수 있다.

사실 개성화는 근대 이전에 결코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다. 근대 이전에는 공동체의 조화로운 삶이 우선이었다. 그렇다면 융의 분석 심리학은 역사성을 무시하고 근대의 발명품으로 고대 신화 등을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옛 신화를 오늘날의 관심사로 읽어내는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닐까? 참-자기, 개성화를 말하는 융의 분석 심리학 또한 근대의 발명품일 테다. 분석 심리학의 작업은 근대의 눈으로 해석되지 않는 민담, 신화 등에 새롭게 현대적 의미를 부여하는 재구성일 수도 있겠다.

또 "개체 발생은 계통 발생을 반복한다"는 생물학계에서 인정되지 않는 낡은 가설을 아직도 언급하는 것도 문제가 있어 보인다. 참-자기, 충일한 정체성 등을 찾는 융의 분석 심리학이 '현대화된 종교성'을 추구한다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이런 의문들은 언제나 융에 따르는 비판이기도 하다. 사실 융의 이론은 반짝이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근거 없는 신비주의라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만약 이것이 서투른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한국 유일의 분석 심리학자인 저자의 다음 책에서는 적극적인 해명(?)이 제시되기를 기다리고 싶다.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 - 우리 이야기로 보는 분석 심리학

이나미 지음,
민음인, 2010


#융, 호랑이 탄 한국인과 놀다 #칼 구스타브 융 #이나미 #분석 심리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2001년 9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2002년, 오마이뉴스 2.22상 수상 2003~2004년, 클럽기자 활동 2008~2016년 3월, 출판 편집자. 2017년 5월, 이달의 뉴스게릴라 선정. 자유기고가. tmfprlansghk@hanmail.net


AD

AD

AD

인기기사

  1. 1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김건희·채상병특검법 부결,  여당 4표 이탈 '균열'
  2. 2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한국만 둔감하다...포스코 떠나는 해외 투자기관들
  3. 3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KBS 풀어주고 이재명 쪽으로" 위증교사 마지막 재판의 녹음파일
  4. 4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이충재 칼럼] 윤 대통령, 너무 겁이 없다
  5. 5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