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휘섭씨와 그의 아내동도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는 우휘섭씨와 그의 아내
조광현
8월 말쯤, 한 단체의 '독도 세계 대학생 축제' 사진 촬영의 부탁받고 독도에 가게 되었다. 3박4일의 짦은 기간에 포항-울릉도-독도를 모두 가야하니 빡빡한 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첫날, 둘째날의 행사에 지쳐 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셋째날, 지친 몸을 이끌고 독도행 쾌속정에 몸을 실었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대략 한시간 반 정도가 걸린다. 그 시간이라도 좀 쉴까 싶어 좌석에 앉아 잠시 눈을 붙였다.
파도의 출렁임 때문인지 쉽사리 잠이 오질 않아 포기하고 배 안의 풍경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독도까지 30분 쯤 남았을까 독도에서 퍼포먼스를 준비하던 일행들의 부산함 때문이었을까, 다른 승객들도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멀리서 보이는 독도를 촬영하기위해 출입이 금지된 갑판으로 몰래 나가려던 중 제지를 당해 당담자와 실랑이 중이었다. 결국 실랑이 끝에 제대로 된 독도 사진은 건지지 못해 다른 쪽에서 찍을까 싶어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그때 마침 노란 등산복을 입은 '그'를 만났다.
그가 나에게 "오늘 무슨 행사있나요?"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행사에 대해 말해 주었고 "오늘 날씨가 맑아 다행이네요, 독도를 볼 수 있어 참 좋네요"라는 말과 함께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그가 31년 전 독도에서 전투경찰로 복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문득 좋은 취재거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좋은 취재거리가 있으면 욕심이 생긴다. 결국 실례라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인터뷰를 청했다.
1978, 79년도에 5개월을 독도에서 복무한 그의 이름은 우휘섭, 30년을 기다려 밟은 그 감격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독도가 보이는 순간 가슴이 설레고 독도에 발을 딪힌 순간엔 눈가에서 눈물이 핑돌았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느끼는 감정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1년 만에 만나는 친구도 그리 반가울 수 없는데 30년을 기다려 만난 추억이랴 어찌 안 반가울 수 있겠는가.
복무할 당시의 추억을 꺼내며 운을 땐 우휘섭씨는 "동도에선 독도경비대가 살았고 서도에선 주민이 살고 있었다"며 "독도주민 1호인 고 최 종덕씨가 살던 서도에 가끔 놀러가 전복, 소라, 문어등을 얻어 먹곤 했는데, 그 맛을 지금까지 있을 수 없다"며 말을 이어 갔다.
같이 근무하던 대원 중 순직한 고 김영수 대원이 생각이 난다는 그는 "절해고도! 외로운섬 독도를 지키다가 피끓는 청춘에 생을 마친 애달픔이 남아있네요"라고 애석해 했다.
당시에도 일본과의 독도문제가 있었냐는 질문에 "그 당시만 해도 독도에 대한 일본과의 갈등이 지금처럼 이슈화되지도 않았고 국민적 관심도 덜했다고 본다"며 "지금은 많은 관심들을 갖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조상대대로 물려 내려온 우리땅인데, 우리가 주인인데... 독도 바위 한곳에 '韓國領' (한국령)이라고 깊이 새겨진 글씨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라며 힘껏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외항선을 탔던 어떤 분이 6개월만에 귀국을 하다가, 독도의 정상에서 펄럭이는 태극기를 바라보고는 목이 메이더라고 하더라"며 "우리의 영토, 우리의 독도는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라고 독도에 대한 애정을 담아 냈다.
우휘섭씨는 현재 휴가를 끝내고 충실하게 업무에 임하고 있다. 독도여행은 감회어린 설렘 속에 잊지 못할 추억이었으며 영남알프스라고 불리는 영축산 등정을 계획 중이라고 했다.
독도가 가진 가치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렵다. 자원적 가치, 영해적 가치도 물론 중요하지만 우리가 가진 역사적 가치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그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면 우리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말처럼 조상 대대로 물려 내려온 우리땅 독도를 마음 편히 바라볼 수 있는 날이 한시라도 빨리 오길 바란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