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 국경지대포셋트만에서 바라본 한러 국경지대
박도
01:00, 배의 롤링(흔들림)이 몹시 심해 잠이 깼다. 시계를 보니 막 1시를 넘고 있었다. 그새 두어 시간 눈을 붙인 셈이다. 화장실을 다녀 온 뒤 스낵코너로 가자 두 그룹의 승객들이 깊은 밤을 잊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포커판이요, 다른 한쪽에서는 마작에 빠져 곁눈질도 하지 않았다. 몇 승객들은 배의 롤링에 맞춰 흔들리면서 텔레비전 시청에 넋이 빠졌다.
문을 열고 갑판으로 나가자 바다는 온통 검은 너울이 넘실거린 게 무서웠다. 하늘에는 상현달이 구름 속에 잠겨 뿌옇게 비췄다. 왼편 북녘 산하는 먹빛이었다. 두꺼운 파카를 입었지만 밤바다 바람이 차고 강했다. 다시 객실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배의 롤링에 메스꺼워졌다.
마침 가방에 아내가 챙겨준 사탕이 있기에 그걸 꺼내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메스꺼움이 조금은 가라앉는 듯했다. 이번 답사 길은 아내가 유독 배 대신 비행기를 타고 가라고 일러도 끝내 듣지 않았다. 가장 낮은 자세로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며 가능한 안중근 의사가 이용했던 교통기관을 그대로 이용하면서 그분의 발자취를 더듬고 싶었다.
2008년 3월 하순, 호남의병전적지 답사가 마무리 될 즈음 눈빛출판사 이규상 대표가 승용차에다 안중근 관련 자료를 한 상자 싣고서 그 무렵 내가 살고 있던 강원 산골 안흥 말무더미 마을로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2009년 10월 26일이 안중근 의거 100주년이 되니 그때를 맞춰 출간할 수 있도록 안중근 평전을 부탁했다. 나는 얼떨결에 분수도 모른 채 승낙했다. 그 뒤 자료들을 두루 살피면서 역사학자도 아닌 내가 평전을 쓰기에는 부담이 갔다.
마지막 여행
1909년 10월 하순, 늙은 여우 이토 히로부미가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드넓은 만주조차도 삼키고 싶은 야욕으로 일본을 떠나 다롄과 뤼순을 거쳐 장춘에서 하얼빈 행 열차를 타고 거침없이 달렸다. 또 다른 하얼빈 행 열차에는 조국을 위해, 동양의 평화를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기어이 당신 손으로 처단하겠다고 권총을 가슴에 품은 안중근을 태운 채 달렸다.
두 열차는 서로 피할 수 없는 단선이었다. 이 두 열차는 끝내 하얼빈에서 일대 충돌,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네 나라뿐 아니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당신 나라를 위해 장렬히 산화한 '마지막 여행'이었다.
이런 우리 근대사의 큰 흐름을 강원도 산골에 앉아 자료만 뒤척이며 안중근 의사를 그린다는 것이 불경스럽기도 하거니와 이미 출판된 책의 아류작이 될 것 같아 역사 현장을 답사해서 쓰기로 방향을 바꿨다. 그런데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더듬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현실로 갈 수 없는 북한지역은 그만 두고라도 연해주 일대와 다롄, 뤼순은 내가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아닌가.
특히 연해주는 러시아 땅으로 언어도 전혀 통하지 않는 나라요, 아는 이도 전혀 없었다. 거기다가 답사 비용도 만만치 않을 듯했다. 곰곰 생각하다가 4년 전 중국 동북일대 항일유적지답사에 길잡이 역할을 했던 한 방송국에 동행 제작 의사를 타진하자 즉각 좋은 기획이라고 흔쾌히 수락하여 제작진과 만나 세부 계획을 세웠다.
마침 내 계획을 알고 있던 의병선양회 조세현 부회장이 안중근의사기념관 김호일 관장을 연결시켜줘서 곧장 찾아뵙고는 유적지 답사여정에 협조 말씀 드렸다. 김 관장은 당신이 아는 바로는 안중근 의사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 답사하여 쓴 책은 여태 없는 걸로 알고 있다고 하면서 매우 좋은 기획이라기에, 그 참에 길안내를 간청하자 어렵게 동행을 허락해 주었다. 방송국 측에서는 나에게 대본까지 부탁해 그걸 쓰면서 출국을 기다리던 차, 갑자기 방송국 측의 사정으로 계획이 무산돼 망연자실했다.
그런 나에게 김 관장은 마침 '2009 청년 안중근 유적답사 대학생해외탐방단'에 동행하자고 권유하기에 거기에 참여키로 하고, 2009년 7월 12일 출국을 기다리는데 일주일 전 갑자기 심장에 바늘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왔다. 안흥마을에서 가까운 횡성의 한 병원에 갔더니 큰 대학병원으로 가보라고 하여 아무래도 대학생 해외탐방단 동참은 일행에게 피해를 끼칠 것 같아 최종 확인 단계에서 불참을 통보했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에서 여러 검사를 하고 통원 치료하였더니 다행히 심장의 통증은 멎었다. 하지만 이미 탐방단은 출국한 뒤라 단념하고는 다른 작품에 매달렸다.
9월 하순 그 작품이 끝나자 안중근 의사 자취를 쫓고 싶은 충동이 불같이 일어났다. 2009년 10월 26일이 의거 꼭 100주년 기념일이기에 10월 중순 쯤 출국하여 100년 전 그날 그 시각을 하얼빈 역에서 맞고 싶었다. 김호일 관장을 다시 만나 연해주 일대의 아는 분과 연해주 방면 전문 여행사를 소개받아 국제전화와 메일로 안내인과 일정을 조정하고 중국 러시아 비자를 받는데 열흘 이상 걸려 도저히 의거일 그 날짜에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대안으로 출발 일을 의거일인 10월 26일로 정하고 속초에서 자루비노 행 동춘호에 승선한 것이다.
원래 하나였던 조국03:00, 다시 잠이 깼다. 객실이 추운 탓으로 새우잠을 자 온 몸이 찌뿌드드했다. 운동 겸해 선내를 돌다가 갑판으로 나갔다. 여전히 동해바다는 검은 너울이 출렁거렸고 하늘에는 옅은 구름으로 뿌연 상현달이 배를 따르고 있었다. 북녘 산하를 바라보니 까마득히 불빛이 가물거렸다. 거리나 시간상으로 보아 단천이나 성진(김책) 항 앞 바다를 항해하는 듯했지만 항로 이동 지도도 없을 뿐더러 깊은 밤이기에 누구에게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다. 배는 큰 너울의 검은 파도를 헤치며 북한 공해를 지나 마냥 북쪽으로 스멀스멀 헤쳐 갔다.
한 원로시인(고은)의 절규처럼 "일백년 전 하나였던… 일백년 후 어찌 하나 아니겠냐는 것 …" 그 언젠가는 다시 분단된 나라가 하나로 합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때는 오늘을 조국분단시대로 나눌 것이다. 이 시대를 사는 글쟁이의 역사관은 어느 것이 옳을까.